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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인호 (동의대학교)
저널정보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연구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2집
발행연도
2009.4
수록면
151 - 187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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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1910년대 김포지역에서 발생한 민족운동이 특별히 통진지역 중심ㆍ유산계급 중심으로 전개된 사회경제적 이유를 지역별 계급별 생산력 구성, 소유 구조, 지세중과세 문제 등을 통하여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양천ㆍ김포ㆍ통진군이 김포군으로 통합되는 1914년 이전 통진군은 상대적으로 비옥한 지역인 반면 구김포나 양천은 경기도의 여타 지역에 비해서도 농업생산성이 열악한 낙후지역이었다. 또한 자작농이 많은 구김포는 1910년대 초반까지는 일본인의 진출이 드러나지 않으나 1917년 이후 증가하면서 농민층 분해로 타격을 받는 농민계층의 反지주·反농장 운동이 고양될 토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둘째, 통진이나 양천지역은 전통적으로 조선인 지주가 기득권을 강력하게 보유한 지역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1913년 이후 김포지역 경작지가 급증했는데, 그 원인은 대체로 토지조사사업으로 총독부가 종래 隱結化된 지주나 재력가의 보유지를 면밀하게 파악한 결과로 여겨진다. 또한 토지조사사업과 함께 1910년대에는 김포일원에 대한 총독부의 과도한 지세 중과세 양상이 포착되고 있다. 이런 조세수탈구조는 당시 서울 등 대도시에 대한 민심 위무를 위해 감세나 낮은 세율이 적용된 반면 통진 등 김포지역 중에서도 곡창지대의 조선인 지주에게 지세 중과세를 실현하여 그 부담을 전가한 것이었다.
이상의 경향은 기왕의 조선인 토지소유자들에게 심각한 위협이 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조건 아래서 김포3ㆍ23만세운동(김포 3ㆍ1운동)은 지역별로 생산력이 높고 지주가 강한 통진지역에서 많이 발생한 것이다.
요컨대, 1910년대 김포지역 민족운동은 기왕의 생산력을 장악한 조선인 유산자층과 국가적 농업 지배를 실현하고 조세수탈을 확대하려는 총독부간의 생산력 쟁탈전의 결과로 본다. 이 위에 1910년대 후반 대규모 일본인 농업자본(농장)의 침투는 기왕의 조선인 유산층의 기득권에 더욱 위기감을 조장했고, 그러한 위기감이 김포지역 조선인 유산자 그룹이 주도가 된 3ㆍ23김포오라리만세운동의 도화선을 당겼다. 그런 의미에서 김포 3ㆍ1운동이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운동이라는 이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목차

1. 머리말
2. 농업생산 여건과 항일운동의 실태
3. 통진ㆍ유산층 중심 항일운동의 경제적 기초
4.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영문요약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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