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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덕형 (한성대학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3권 제2호
발행연도
2010.11
수록면
171 - 200 (30page)
DOI
10.17068/lhc.2010.11.13.2.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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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왕조 500년간 조영된 42기의 왕릉 중 선조 비 의인왕후 유릉이 조선후기 왕릉 조영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그 내용의 요지는 첫째,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이 발생하기 이전에 조영된 왕릉 중 문종의 현릉을 제외한 다른 왕릉은 대개 단독 능역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둘째, 임진왜란 이후 조영된 선조 비 의인왕후 유릉은 5개월을 넘겨 건원릉 화소지역에 조영되었다. 조선시대 왕릉 조영은 5개월이라는 기간이 정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릉은 그 기간을 지키지 못했다. 그리고 유릉 조영 이후에는 조선왕릉 능역지 선정에 변화가 일어났다. 셋째, 유릉이 조영된 이후 한양 동ㆍ서쪽에 조영 되어있는 왕릉 화소지역이 점차적으로 집단 능역화(공동묘지)되었다. 이러한 현상들은 결국 왕권과 신권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에서 어느 한쪽의 의견이 전반적으로 수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이와 같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유릉의 능역지를 선정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천착해 보았다.
유릉이 조영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로서 이직까지 사회적 혼란이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릉 능역지 택지 과정을 살펴보면 왕과 사대부 간에는 매우 진지한 풍수담론이 전개되었다. 그 담론의 중심에는 명나라 군인신분의 중국인 풍수사가 등장하기도 했다. 유릉이 조영되기 이전 조선왕릉 능역지 선정에 중국인 풍수사가 동원된 사려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유릉 능역지 선정과정에 중국인 풍수사가 관여하기도 했지만 결국에 가서는 조선의 사대부들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이때 조선 사대부들에 의해서 지목된 능역지 중 주목할 곳으로 포천 신평을 꼽을 수 있다. 신평은 중국인 풍수사의 권유와 사대부들의 동의로 유릉 능역지로 지목되어 40일 이상 능역공사가 진행 된 곳이었다. 하지만 능역 공사가 마무리 되어가던 즈음 조선인 풍수사 박자우의 상소로 능 조영 공사는 멈추게 되었다. 그 후 사대부들이 새로운 능역지로 추천한 곳은 건원릉 화소지역이었다. 건원릉 화소지역은 문종의 현릉조영 이후 근 150년간 왕릉 능역지로 사용되지 않았던 곳이다. 하지만 선조는 건원릉 화소지역을 의인왕후 박씨의 능역지로 승인하였고, 이후 건원릉 화소지역에는 다른 왕릉이 계속 조영되었다.

목차

[초록]
1. 머리말
2. 조선 전ㆍ후기 왕릉 능역지의 특성
3. 유릉 택지와 풍수담론
4.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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