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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상선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37輯
발행연도
2010.7
수록면
169 - 186 (1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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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초기 왕도였던 顯州와 中京의 치소로 비정되는 西古城의 관계를 문헌과 고고학적 성과를 중심으로 정리해 보았다.
舊國에서 현주로의 천도는 늘어난 영토의 효율적인 통치와 국력의 상승에 따라 天寶중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서고성이 발해시기 도성이 있던 현주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고 있다. 특히, 용두산고분군(용해고분군)에서 정효공주 이외에 文王과 簡王의 皇后墓등이 발굴되면서 서고성의 존재에 대하여 새로운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서고성에서 발해 早期에 속하는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주변에 있는 유적 증에서는 河南屯古城에서만 초기의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그렇다면, 현주성의 유지는 서고성이 아니고 하남둔고성이고, 이 성은 王都로서의 역할을 마친 후, 서고성에 수반하는 陸園이 되었다고도 추정하기도 한다.
현주가 서고성이 아니라 하남둔고성에 있었다고 한다면, 현주 시기에는 단지 府만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발해에서는 府가 먼저 생기고, 京이 뒤에 생긴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현재 알려진 부의 명칭은 방위적인 개념보다는 그곳의 과거의 명칭을 연용한 경우가 많고, 특히 경은 방위적인 개념이므로, 발해의 영역이 어느 정도 확정된 상태에서 정해진 것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동경, 서경, 남경, 중경, 상경의 명칭이 생긴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즉 경은 부에 비해서 뒤에 붙여졌을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고성의 축조시기를 알기 위해서는 정효공주를 비롯한 유적의 절대편년을 알 수 있는 고분이 발굴된 용해고분군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재 용해고분군에는 정효공주를 위시하여 그 이후의 왕족이 묻혔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다면, 이 고분군의 편년은 8세기 말 이후가 되고, 서고성이 현재와 같은 규모를 갖추게 되는 것은 대략 9세기 전반 이후로 추정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발해의 王都현주
Ⅲ. 中京의 치소, 서고성
Ⅳ. 맺는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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