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미술연구소 미술사논단 美術史論壇 第20號
발행연도
2005.6
수록면
49 - 79 (31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2001년 전남 高興郡 豆原面 雲垈里 요지군에 대한 학술 조사가 일단락되었고, 이어 2004년 운대리 도요지 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필자는 한국도자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문제를 운대리 요지와 결부시켜 검토하게 되었다.
첫째는 조선 초기(1392-1468) 운대리 요와 도기소 자기소 및 其他窯의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고 둘째는 조선 전기(1468-1592)에 운대리 도자기가 일본에 수출된 무역자기였을 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이 가운데 첫 번째는, 조선시대에 수많은 가마가 도기소, 자기소로 등재되지 않은 ‘기타 요’였기 때문에 그 개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는 주제이다. 기타 요에 대한 이해에는 『세종실록』「지리지」 고흥 지방에 ‘자기소, 도기소가 서쪽에 각각 한 군데 있는데 모두 하품’ 이라는 기록이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 기록에서 고흥의 도기소, 자기소는 운대리 요지와는 전혀 위치가 다르며 운대리 요업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다. 즉, 운대리 가마는 세종연간의 도기소, 자기소와 어떤 관련도 없다. 그럼에도 수많은 가마가 운대리에 밀집되어 운영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조선 초기의 제3의 가마 즉, 기타 요에 대한 개념이다.
두 번째는, 조선 전기(1468-1592년)에 운대리 요에서 대량생산된 귀얄분청, 분장분청과 극소량의 철회분청과 그 수요처를 밝히고자 한 것이다.
주지하듯 경기도 광주에 분원 관요가 설치(1467. 4-1468. 12)되면서 분원에서 백자를 주로 생산하였다. 그 영향으로 전국 각지에서 백지를 주산품으로 제작하기 시작하여, 조선은 백자의 시대로 바뀌었다. 그런데 고흥 운대리에서는 계속 귀얄, 분장 등의 분청사기가 대량 제작되었다. 이는 백자보다 귀얄분청과 분장분청을 선호하던 일본 수요자들을 겨냥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일본에서 조선 도자의 사용이 급증한 것은 센노리큐(千利休: 1522-1591)가 茶道를 확립하면서부터의 일이다. 이 때부터 일본인은 센노리큐의 정신을 이어 질박하고 자연친화적인 다완을 일상생활에서 사용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564년 중국 도자기는 茶會에서 소용없어졌다는 기록, 중국 다완을 사용하는 유행이 사라지고 高麗茶碗, 세토다완, 라쿠다완을 사용한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도 파악된다. 이는 일본에서 조선 도자기를 중국 도자기보다 한층 선호했음을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기록들이다.
일본에서는 조선 도자기를 ‘고려다완’ 이라 불렀다. 고려다완이라는 명칭은 1506년 문헌에 등장한 후 1561년부터 1591년까지 30여 년간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임란 이전부터 조선 도자에 대한 관심과 수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의 다완, 그리고 특히 가라쓰(唐津)와 시노(志野) 도기는 일본에 수출된 조선 도자기의 영향을 직접 받았다. 특히 상감분청, 인화분청, 박지분청, 철회분청, 귀얄분청, 분장분청, 백자, 철회백자를 모방하였다. 이 가운데 운대리 분청사기도 모방의 대상이었을 것이라는 것이 필자의 견해이다. 이렇게 조선 도자기를 모방한 양식은 일본 도자기의 중요한 전통을 이루었다.
운대리 분청사기는 굽 안바닥까지 백토 분장이 두텁게 입혀진 특징을 보인다. 투박한 흙의 질감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기호에 잘 맞는 그릇이다.
한국 도자사에서 운대리 가마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를 지적하자면, 소량이지만 철회분청의 존재이다. 철회분청은 일찍이 충남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에서만 제작된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운대리에서도 철회분청이 제작된 것은 새로운 사실로서 주목된다. 조선의 철회분청은 철회백자와 함께 미노(美濃)의 시노와 히젠(備前)의 에가라쓰(繪唐津)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도 13-23.
운대리 도자기는 육로나 해로를 통해 주변 지역으로 원활하게 운반되었을 것이며 주변 입지로 보아 무역자기로서의 가능성이 충분하다. 경남 웅천 가마의 도자기가 일본에 수출되어 다완으로 애용된 것처럼, 운대리 가마의 도자기 또한 일본 수출용 도자기로서 손색이 없다. 국내에서는 고흥과 주변 지역 주민들의 생활용기로, 그리고 지역의 관청 소용 그릇으로도 공급되었을 것이다.
운대리를 중심으로 하여 이러한 연구가 기능한 것은, 나말여초의 청자, 여말선초의 회청사기, 조선의 분청사기와 백자, 특히 극소량이지만 철회백자 등이 요지에서 출토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토 양상은 운대리가 통일신라 말부터 조선까지 오랜 요업의 역사를 지니면서 다양한 도자기를 제작했음을 말해 준다. 운대리는 특히 조선시대에 요업이 활발했다.
필자는 이 글을 통해 도기소, 자기소, 기타 요에 대한 개념을 정리하고, 무역자기로서 운대리 도자기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한다. 다만 구체적인 문헌 전거를 추적함으로써 무역 경로를 복원하는 등의 밀도 있는 작업은 후일의 연구로 미루기로 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운대리 요지 개관
Ⅲ. 조선 초기의 고홍 운대리와 도기소ㆍ자기소
Ⅳ. 조선 전기의 운대리와 대일무역도자
Ⅴ. 운대리 요지의 도자사적 의의
Ⅵ.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26)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10-650-0025567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