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구려발해학회 고구려발해연구 高句麗渤海硏究 第33輯
발행연도
2009.3
수록면
95 - 130 (3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榮留王代(618~642)의 정국운영에 대한 기존연구의 대체적인 견해는 온건한 성향의 정치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고 이러한 분위기가 642년 淵蓋蘇文政變이 발생되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기존연구에서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을 위와 같은 구도에서 인식한 근거는 영류왕 즉위 후 외교노선이 급격히 온건한 방향으로 흐르는 정황이다. 그러나 618년 영류왕이 즉위한 이후부터 630년대 초반까지의 대외정책을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면 그것은 강경책과 온건책이 적절히 결합된 정상적인 외교노선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대백제·대왜관계라든지, 천리장성의 축성, 그리고 7세기 초반 중원세력의 재편과정에서 나타난 국제정세의 변화 등으로 볼 때 영류왕대의 외교노선은 영양왕대의 그것에서 급격히 변화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따라서 당시 외교노선의 부분적인 변화를 근거로 정치세력의 교체를 가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영류왕의 즉위로 정치세력이 교체되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온건한 성향의 국내계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은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실 영류왕대에 국내계세력이 장악했다고 하는 견해는 그 자체에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훗날 영류왕과 대립하게 된 연씨세력은 평양계세력의 대표적인 귀족세력으로 강경한 성향을 지녔던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연씨세력은 영류왕대의 세력교체 과정에서 도태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연씨세력은 영류왕이 즉위하면서부터 오히려 권력기반을 더욱 탄탄히 다져나가게 된다. 이는 금석문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모순이 발생되는 원인은 기존연구에서 연씨세력을 평양계세력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금석문에 나타난 그들의 가문내력이 비교적 짧다거나 혹은 고구려왕실과의 친연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의 묘지명을 전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연씨세력의 가계서술 방식은 보편적인 방법을 따르고 있다. 즉 묘지명의 가계서술 형식을 가지고 가문내력의 길고 짧음을 판단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東部라는 거대한 세력기반을 소유하고 있었고, 물에서 기원했다는 신화적 전통을 간직하고 있었던 고구려의 대표적인 귀족세력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연씨세력을 평양천도 이후 갑자기 출현한 신진귀족세력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평양계세력과 국내계세력의 대결이라는 구도는 427년 평양천도 이후의 정치를 묘사한 개념이다. 이것을 618년 영류왕이 즉위하는 시점까지 끌고 와서 적용시킨다면 영류왕대의 정치사는 강경세력과 온건세력의 대결구도 속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당대의 정치사가 2분법적 대결구도로 단순화 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따라서 영류왕대의 정치사는 위와 같은 구도에서 벗어나서 인식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점에 따라 영류왕대의 정국운영을 새롭게 들여다보면 연씨세력은 영류왕 즉위 초에 정치적인 협력관계를 형성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들이 영류왕 즉위 후 막리지를 역임하게 된다든지, 영류왕이 귀족연립정권 아래에서 영양왕의 적장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을 유추해보면 양자의 결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630년대 경관파괴를 기점으로 영류왕의 정국주도권이 약화되면서부터는 연씨세력이 고구려의 권력을 장악해 나갔고 이때부터 연씨세력과 영류왕은 정치적인 대립관계를 형성시키게 되었다. 당시 연씨세력의 입지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것은 ‘병권을 장악하여 기세가 삼한을 아우르고 명성은 5부의 우두머리가 되었다.’는 금석문의 기록이다.
그런데 630년대 말 연씨세력의 대표 격인 연태조가 사망하고 신라 칠중성에 대한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면서부터는 정국의 주도권은 다시 영류왕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재차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 영류왕은 태자를 입조시키는 등의 급진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여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 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적인 연씨세력의 약화를 유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연씨세력의 새로운 수장인 연개소문과 영류왕의 대립이 본격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나타난 영류왕대 정국주도권의 변화양상은 뒤에 일어나는 연개소문 정변의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하게 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執權前半期外交路線의 성격과 政治勢力의 교체 與否
Ⅲ. 執權前半期榮留王과 淵氏勢力의 관계
Ⅳ. 執權中ㆍ後半期政局主導權의 變化樣相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09-911-018371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