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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사상문화학회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과 문화 제57호
발행연도
2011.1
수록면
153 - 18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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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연개소문의 출자 기반에 대하여 검토한 것이다. 연개소문 가문의 출자에 대한 그간의 연구는 그들을 평양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으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연개소문 가문의 출자를 전하는 삼국사기 기록에서 東部大人이라는 설과 西部大人이라는 상반된 정보가 혼재함을 발견하였다. 더군다나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영류왕이 ‘연개소문에게 장성 축조를 감독하게 하였다’는 기록 정보는 중국의 사서에는 없는 고구려의 고유 전승으로 파악된다. 이를 토대로 연개소문 가문이 서부대인이라는 기록은 고구려 五部와 연관하여 졸본 지역의 유력 토착세력인 연노부(涓奴部)와 연결될 수 있음을 제기하였다. 그렇다면 연개소문 가문은 평양의 신진세력으로는 볼 수 없는 것이 자연스럽다. 연개소문 가문과 관련한 설화들이 요동 지방에 산재하는 것도 이 지역과 연개소문 가문의 독특한 연결점을 제공한다. 게다가 연개소문의 장자인 남생은 형제들인 남산ㆍ남건과 불화가 생기자 국내성 지역으로 피신하였다. 그는 이후 부근의 13개 지역의 유력자와 함께 당에 투항하였다. 그런데 만약 연개소문 가문이 평양의 신진세력이라면, 아무런 연고가 없는 국내성 부근 지역의 세력들이 천남생에게 호응하였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하기 어렵다. 따라서 남생의 국내성 피신은 연개소문 가문이 졸본을 위시한 국내성 부근에 기반한 세력이었기에 선택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맥락에서 영류왕대 행해진 시조묘 제사는 연개소문 가문과 연계한 국내성 세력과의 유대를 위한 정치적 행위였던 것으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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