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崔南善의 『少年』誌와 東敬治의 『陽明學』誌를 중심으로 近代 韓國ㆍ日本의 「陽明先生肖像」에 나타난 思想 戰略을 살펴본 것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로서의 王陽明 사상이 일본의 明治期에서 재평가되어 근대적 학문의 맥락에서 朱子學, 古學이란 용어와 더불어 新造語인 ‘陽明學’이란 개념이 탄생하여 중국으로 進輸出되고, 한국은 일본과 중국 양방향에서 그 개념 수용의 시간적 편차를 보이면서도 근대 학술로 서서히 편 입해간다. 이 속에는, 近代知의 領有와 交信이, 동아시아 내부에 제국주의의 확산과 맞물려 진행된 遊學生 및 지식인의 교류, 텍스트 流通網을 통해서 긴밀히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서 「陽明先生肖像」은, 근대적 정신을 고취시키는 하나의 주요 記號로서, 아울러 실천적 사상을 전하는 미디어 역할을 하는 형태로 유통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것이긴 하지만, 한국과 일본에서는 새로운 각도에서, 새로운 맥락 속에서 그것을 복제 혹은 재생산하는 형태로 잡지나 저술 등에 편집하여 넣는 형태로 활용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王陽明 생전과 逝去 후에 여러 종류의 초상화가 나온다. 이들의 일부가 한국과 일본으로 유입되어 활용된다. 일부는 복제되고, 일부는 모사되고, 또 일부는 중국에서 유출되어 일본에만 남아있기도 하다. 이러한 복잡한 정황은 동아시아 근대사의 복잡한 궤적과도 맞물려있다. 주자학이 주류를 이룸으로써 양명학 유통망에 장애가 있었던 한국에서는 「陽明先生肖像」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거의 유일하다고 말할 수 있는 崔南善의 『少年』誌、 終刊號에 들어있는 「陽明先生肖像」일 것이다. 이 號에는 특집으로서 讓谷 朴殷植(l859~ 1925)의 『王陽明先生實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데, 이 특집호의 口繪로서 실린 것이다. 이에 비해 일본에서는 東敬治(호는 正堂, 敬治는 이름 1860- 1935)가 주간하는 「陽明學會」 발행의 『陽明學』을 비롯하여 여러 종류의 잡지와 학술서를 통해 다량의 「陽明先生肖像」이 유통된다. 여기서는 모든 것을, 지면 관계상 모두 다루지 않고 그 가운데 朴殷植에게 영향을 주었던 『陽明學』을 대상으로 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여기에만여러 건의 「陽明先生肖像」이 실려 있다. 그런데 이것은 대부분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동아시아 근대기에 「陽明先生肖像」은 일반 대중 그 가운데서도 청년 및 소년(=청소년)을 계몽하는 하나의 ‘실천적 정신’을 전달하는 새로운 미디어로서 등장하고 있었으며, 또한 肖像의 선택에는 나름대로의 의미부여가 있었다. 그렇다면 肖像은 근대적 사상을 전달하는 전략으로서 하나의 미디어 역할을 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 논문에서는 王陽明 생전 및 逝去 후에 나타난 肖像畵를 살펴보고, 한국의 「陽明先生肖像」은 崔南善의 『少年』誌를 통해서, 일본의 그것은 東敬治의 『陽明學』誌를 통해서 각각 살펴보고 그 近代的 의의를 思想 戰略的 자원에서 짚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