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霞谷集』 권두, 정제두의 육대손인 鄭文升이 기록한 차록에 『先祖 沒後, 樗村 沈公과 遁谷 李公의 여러 문인들이 남아있는 글들을 수집하였으나 출간하지 못한 채 두 분이 연이어 돌아가셨다』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이후 그 누구도 심육과 이진병이 정제두의 문인이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번에 나는 심육과 이진병에 관한, 지금까지 주목한 적이 없는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였다. 이 자료에 따르면 심육은 정제두의 학문을 계승하지 않았고 이진병은 정제두의 문인이라기보다 윤증의 고제였다. 정제두는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유고도 정리하지 않은 채 1738년 88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였고, 그로부터 5년 후(1741년)에는 아들 鄭厚一과 고제인 尹淳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편찬 도중 지휘관 부재라는 심각한 사태에 봉착한 것이다. 당시 정제두의 핏줄로는 11살의 손자 志尹이 있었을 뿐이다. 정제두의 ?咳에 접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나면서 윤증의 입장에 가깝고 정제두에게는 비판적이었던 심육과 이진병이 『하곡집』의 가장 중요한 일차 편찬 작업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나는 본 발표문의 마지막에 심육과 이진병에 이어 제3의 인물이라 해야 할 이성령을 다루었다. 그는 정제두의 백부지만 종래 주목받은 적이 없는 특이한 인물이다. 그 인간상을 통해 현행 『하곡집』에서는 볼 수 없는, 정제두를 둘러싼 사상공간의 일단을 제시하였다. 이성령은 도가수양설을 흠모하였고 역사에도 밝았으며 구황활동에도 힘쓴 인물이다. 그에게 초점을 맞추어 정제두 주변의 사상공간을 살펴보면, 예컨대 박세채나 柳尙運처럼 도교적 시를 즐겨 읊었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또 이성령은 당시 정국을 흔들었던 송시열과도 교류가 있었는데, 이성령의 관점에서 보면 성리학이나 정치적?학문적 투쟁에 몰두했던 송시열과는 또 다른 인간성이 나타난다. 이성령이 살았던 이런 사상적 토양이 정제두의 사상 형성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고는 단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상, 정제두의 극히 가까운 존재이면서 정제두나 강화학파에 관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제대로 논의된 적이 없었던 세 명의 인물을 통해 『하곡집』 편찬과 정제두의 사상형성에 관해 사견을 밝혔다. 본 발표가 정제두에 관한 역사적 사실로서 타당한 것인지, 또 이처럼 「주변」에서 「중핵」으로 좁혀가는 연구 방법이 유효한 것인지 여러분의 의견을 들을 수 있다면 매우 다행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