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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사학회 미술사학연구(구 고고미술) 美術史學硏究 第250·251號
발행연도
2006.9
수록면
121 - 147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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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청자를 의미하는 9세기 발생설은 중국 玉壁底碗과 전남 康津郡의 初期靑磁窯의 日暈底碗이 조형적으로 매우 유사하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 완이 중국 唐後期(8세기 후기-9세기 전기)에 유행했던 양식이라는 점과 관련하여 중국에서 이 완이 사라지기 전에 늦어도 9세기 중기에는 한반도에서 제작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이후부터 기존에 9세기발생설과 달리 10세기 들어 五代 越州窯의 영향으로 先日暈底碗이 시작하고 이어 玉璧底완과 똑같은 日暈底碗은 중국에서 유행이 끝난 1세기 이상 뒤에 리바이벌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五代前期에 매우 특수하고 예외적인 것을 방조했을 것이라는 10세기 발생설이 나왔다.
이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서리요 제1기층 출토의 先日暈底碗은 唐末-五代에 越州靑磁의 玉環底碗과 근본적으로 다르며, 이 완의 굽 형태는 만당 9세기 중기 월주청자에서 가장 보편적인 굽에 가깝고 五代에 가면 접지면이 더 좁고 전체 비례가 더 오뚝해지는 현상이 나타나 방산대요의 輪形底에 더 가까워진다. 따라서 선일훈저완 형식에서 방산대요의 윤형저로 변하는 것이 순리적인 변화라고 본다.
둘째, 日暈底碗이 중국 玉璧底와 관련 없다는 견해는 자료 분석 과정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강진요의 초창기 內低曲面의 中國式 日暈底碗이 張保皐 島 유적(828-841년)출토 월주청자 大涇/狹幅式 玉璧底碗에 가장 가까워서 연관 관계를 긍정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생겼다.
셋째, ?圈을 중심으로 분석하면서, 방산대요에서 이 기술이 적용된 것은 康陵(939년)시대 이전일 가능성은 아주 낮으며, 용인서리전축요(제1-2기층)나 토축요에서 확인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점권 기술의 전파 이전에 서리요가 개요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목차

Ⅰ. 머리말: 初期靑磁의 槪要와 문제 제기
Ⅱ. 연구 성과의 검토
Ⅲ. 자료의 분석과 문제 제기
Ⅳ. 맺음말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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