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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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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27號
발행연도
2007.6
수록면
827 - 852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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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倭橋의 지명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정유재란시에 처음으로 생긴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하였다. 왜교의 지명 연원이 고려말 왜구침략기에 있었던 倭人集團의 체류 또는 그들의 거주와 관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본대로 공민왕대를 전후한 시기에 순천지역은 왜구의 침략이 집중된 곳이었을 뿐 만 아니라 왜인 추장과 함께 집단적으로 관내에 체류하며 조정으로부터 관급의 식량까지 지급받은 예가 그 점을 뒷받침해 준다. 그러므로 倭橋城이 위치한 포구에는 일찍부터 왜인들과 관련된 倭橋村이 형성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유년에 쌓은 왜교성의 규모나 험준한 지형으로 보아 소서행장군이 불과 3개월만에 축성을 완료하였다는 점에 있어서도 의문이 제기된다. 즉 일시에 대규모의 인력을 동원했다 할지라도 그 기간으로서는 불가사의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왜교의 지명이 고려말에 비롯된 것이 사실일 경우, 정유재란시 현지에는 전시대에 이루어진 城堡類의 잔재가 남아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일본군의 순천 왜교성 축성 목적은 지구전을 계획한 가운데 기회를 보아 호남지방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광양만의 요해처를 근거지로 택한 것은 남해 사천으로 이어져 영남 해안지역에 포진된 自國軍과의 협동작전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며, 물론 전세가 그들에게 불리해질 경우에는 철병하는 데도 유리한 지점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종전기에 가까운 1598년 4월 이후의 상황은 일본군 진영에 패색이 역력해지면서 그들의 철병이 예상되었지만, 빠르게 보아도 1597년 말까지의 상황으로는 왜교성의 일본군에게 철병의 의지는 보이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일본 再侵軍이 정유년 9월, 왜교에 축성을 하면서부터 철병계획을 갖고 있었다거나, 축성의 목적이 일시적인 생존대책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왜교성전투는 1598년 9월 하순부터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벌어지기까지 약 2개월간에 걸친 전쟁이었다. 이 전투는 임진왜란 7년전쟁의 최후 전투이면서 조ㆍ명ㆍ일 3국군이 모두 참전한 가운데 그것도 수륙합동작전으로 펼쳐진 정유재란 최대의 격전이었다. 단 하루만의 전투에서 명의 전선 수십척이 장도 앞바다에서 격침당하고 그들 수군의 전사자가 8,9백에 달하였을 만큼 큰 희생을 치른 혈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교성전투의 戰史가 우리에게 잘 인식되어 있지 못한 까닭은 소위 ‘성웅 이순신’의 순국사관과 관련하여 노량해전만을 지나치게 강조해온 데 그 원인의 하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본대로 노량해전은 왜교성전투의 최종단계에서 벌어진 마지막 1회전의 싸움이었음을 분명히 한 가운데 7년 전쟁사가 정리되어야 할 것이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정유재란과 순천지역의 실정
Ⅲ. 왜교성의 축성과 일본군의 동태
Ⅳ. 왜교성전투와 노량해전
Ⅴ. 맺음말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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