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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사학사학회 韓國史學史學報 韓國史學史學報 제26호
발행연도
2012.1
수록면
5 - 60 (5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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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임진왜란사 인식의 맹점 가운데, 가장 먼저 지적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릇된 사료인식의 문제이다. 잘못된 사료인식이야 말로 충실한 임진왜란사 연구를 저해한 요인으로 작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사료들은, 흔히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한 중 일 3국에 공히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측의 1차사료들이 집적된 한국의 문헌들이다. 따라서 당대에 이루어진 조선측의 방대한 문집자료들과 다양한 전쟁일기류, 그리고『선조실록』중심의 관찬사료들을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새로운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임진왜란사 인식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7년전쟁의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문제이다. 이를테면, 왜 조선측에선 정규군이 아닌 민병이 전투를 주도하였으며, 일본군은 해전에서 왜 조선수군에게 연전연패를 거듭하였는가? 그리고 정유년 일본군의 재침목표는 무엇이었으며, 당시의 전쟁양상은 1차 침략시와 어떤 차이가 있었는가?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개전 초기에 조선측이 일방적인 패퇴 끝에 불과 18일만에 수도 서울을 내놓았던 원인은 훈련된 정규군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군이란 것이 있었지만 이것은 평소에 훈련된 국군이란 뜻이 아니었다. 관군이란 전쟁이 발발한 후에야 관리가 농민들을 모집하여 지휘했던 군사들이었을 뿐이다. 즉 비관인 출신의 선비들이 지휘했던 민병(의병)이란 것과 성분상 차이가 전혀 없었던 것이 당시의 관군이었다. 16세기의 조선왕조는 훈련된 상비군을 보유하지 못했던 상황에서 임진왜란을 당하였고, 따라서 민간에서 일어난 비정규군, 즉 의병이 전쟁을 수행했었다. 한편 섬나라 일본의 침략군은 바다를 건너 쳐들어오면서도 사전에 제대로 된 군선과 해상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무모한 침략전쟁을 일으켰으니, 이 또한 임진왜란사 연구에서 깊이 재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와 함께 조선수군의 전통적인 해상전력이 일본군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던 배경과 수군의 조직실체, 판옥선과 함재화력 등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도 함께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국의 해전실상들을 역사교과서에 기술하여 조선왕조가 전통적인 해상강국이었음을 새롭게 인식시켜야 함은 물론이다. 정유재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한 결과로 인해 당시의 전쟁피해가 얼마나 참혹하였는가에 대한 역사이해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정유란은 임진년의 제1차 전쟁에 대한 보복전쟁의 성격을 띤 재침전쟁이었고, 곡창지대인 전라도 전역을 초토화시킨 전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침의 전쟁실상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 못함에 따라 명량해전이 오직 대첩으로만 이해되었을 뿐, 그 결과가 철저한 보복으로 이어져 최악의 전쟁피해를 불러왔다는 사실을 알 수 없게 하였다. 정유재란은 세계전쟁사상 유례가 없는 잔혹한 침략전쟁이었다는 사실, 히데요시의 작전명령에 따라 일본의 침략군이 조선의 부녀자와 노약자들까지 잔인하게 살륙하였을 뿐 아니라 닥치는 대로 귀를 베고, 코를 절단하는 만행들까지 자행된 구체적 사실들이 밝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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