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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저자정보

김하늬 (서울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발행연도
2018
저작권
서울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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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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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淸代 초기 詞壇의 영수인 朱?尊의 前?後期詞 창작 양상의 변화를 明淸 교체기 강남 지식인의 정체성 변화라는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구 왕조의 遺民 詞人에서 새로운 왕조의 學人으로 정체성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주이준의 내면세계 변화가 그의 사 창작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전통중국에서 ‘한족문화의 중심’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강남 지역은 이민족 왕조로의 교체라는 정치적 격변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은 지역이었다. 강남의 한족 지식인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들보다 문화적으로 열등한 이민족에게 통치받기를 거부하고 ‘遺民’이 되기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세가 안정되고, 청 정부가 고압 정책과 회유 정책을 동시에 활용하여 지식인 계층을 길들이면서, 이들은 서서히 정신적인 변화를 맞이하였고 마침내 통일 정부 안으로 흡수되었다. 본고는 주이준 전?후기사의 명확한 창작 양상 변화를 바로 이와 같은 명청 교체기 강남 지식인의 정신적 변화의 결과로 본다.
주이준의 사 창작은 ‘나’의 내면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서 ‘외부 세계’를 탐구하고 기록하는 것으로 그 초점이 옮겨갔고, 개인의 ‘悲哀’는 약화되는 대신 지식을 과시하고 문학적 유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변화하였다. 주이준의 전기사는 사의 서정 기능을 극대화한 것으로 작자 개인의 ‘비애의 토로’라는 측면에서 분석 가능하다. 본고에서는 사회적 금기를 파괴한 애정 경험에서 비롯된 비애, 士大夫로서의 비애, 그리고 과도기적 단계에서의 제한적 비애 표현으로 구분하여 이를 분석하였다.
사의 가장 대표적인 제재라 할 수 있는 愛情詞의 경우, 주이준은 정형화된 애정의 표현에서 벗어나 실제 애정사의 좌절에서 야기된 비애의 감정을 노래하였다. 실제 인물과의 애정 경험을 소재로 하여 내용적으로 파격을 이루었고,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작품들을 재배치하여 하나의 자기 서사를 완성하였다는 점에서 형식적으로도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은 개인의 ‘情’의 표현을 긍정하는 작자의 문학관이 반영된 것으로, 주이준의 애정사는 전통적인 애정사의 한계를 극복하고 작자의 ‘자기 서사’를 완성하여 개인의 진실한 감정을 토로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주이준이 遊幕 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창작한 ≪江湖載酒集≫의 경우, ‘遺民’과 ‘客’으로서의 주이준의 사대부적 비애를 표출하였다. 작자는 공간의 통시적인 인식을 통해 유민으로서의 역사의식을 드러내었고, 시간의 유한성을 인식하여 변화하는 시간에 대한 경계를 드러냄으로써 실의한 ‘客’의 비애를 표출하였으며, 교유 과정에서 ‘客’으로서의 동지 의식을 드러내나 이 관계는 결국 일시적일 수밖에 없음을 자각하여 내면의 갈등을 드러내었다.
주이준 사 창작의 전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시점에 창작된 ≪蕃錦集≫은 내용적으로는 여전히 ‘나’의 감정을 토로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 형식적으로는 학문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集句’라는 방식을 사용함으로써 ‘學人’의 사로의 이행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과도기적 단계의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비애’의 감정을 주로 하여 自我抒情을 목적으로 창작된 주이준의 사는 博學鴻詞科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즈음 이전과 다른 사풍으로 변모하였다. 주이준의 후기사는 이 시기 지식인이 자신의 내면세계에 집중하여 개인의 비애를 토로하는 ‘詞人’에서, 문학 창작에서 학문의 가치를 강조하고 지식의 서술에 몰두하는 ‘學人’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주로 ‘詠物詞’의 유행 현상으로 나타났다. 이 시기에 이르러 지식인들의 관심사가 ‘나’의 내면의 감정에서 ‘나’의 외부에 있는 ‘세계’로 옮겨가게 되었고 그것이 ‘外物’을 탐구하고 노래하는 영물사의 발전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주이준은 南宋 유민의 영물사집인 ≪樂府補題≫를 발굴하고 유행시켰는데, ≪악부보제≫가 주로 ‘나’와 ‘物’을 일치시키는 기탁의 방법으로 유민의 한을 표출하였다면, 주이준은 ‘나’와 ‘物’ 사이에 분명한 거리를 두었고, 영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사물의 속성을 사로써 표현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 주이준 사에서 유민 의식은 거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주이준의 영물사는 전기사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던 작자 개인의 비애의 감정은 축소되고, 대신 외부 세계를 예리하게 관찰?탐구하고 그것을 기록한 결과로서의 ‘學人의 詞’의 특징을 보인다. 작자는 그가 접촉하는 세계의 확대에 따라 사물 인식 또한 확대되었는데, 이에 따라 다양한 사물을 ‘物’로 인식하고 그것을 영물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주이준 영물사는 다양한 사물을 두루 아울러 그것의 속성을 탐구하고 예리하게 묘사하여 사물에 대한 전면적인 지식을 기록하는 博物志的 성격을 보인다. 작자는 또한 다량의 典故를 사용하여 자신의 지식을 과시하고 문학적 유희를 추구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주이준의 후기사는 ‘학문’을 사 창작의 중요한 요소로 삼아 ‘以學爲詞’하는 ‘학인의 사’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주이준의 후기사에서 이전과 같은 개인적 감정의 토로가 사라진 것, 특히 유민 의식이 약화된 것은 명청 교체기 ‘小遺民’이 갖고 있었던 태생적 한계의 영향이 크다. 1세대 유민과 2세대 유민 후속 세대 사이의 이 과도기적 세대는 확고한 유민 의식을 갖지 못하였기에 언제든 새 왕조에 흡수될 가능성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생계유지의 어려움과 현실정치 참여에 대한 욕구 등으로 유민 의식은 더욱 약화되었고 설령 유민 의식이 남아있다 할지라도 청조의 고압적인 정책은 지식인들을 정신적으로 위축시켜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따라 주이준을 비롯한 당시의 지식인들이 자신들이 동일시하는 남송 유민의 사를 애호하면서도 그것의 제재나 형식을 모방하는데 그칠 뿐, 내용적으로는 그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족 지식인의 문화적 우월성을 지켜주는 ‘博學鴻詞科’ 정책이 실시되자 유민 집단은 회유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한족 지식인이 학문, 특히 古學에 몰두한 것은 청조의 통치가 안정됨에 따라 유민 의식이 약화되고 새 왕조에 저항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 유민 사회가 마지막으로 남은 그들의 민족적 자존심인 ‘문화적 우월성’만은 보존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학에서의 학문 추구 역시 이러한 원인으로 인한 것일 것이다.
‘學人’으로서의 주이준의 후기 사 창작이 특히 ‘영물’에 집중하게 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當代 지식인들의 관심이 고조되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명대 후기부터 서서히 ‘物’을 경계하는 ‘玩物喪志’의 시각에서 벗어나면서 ‘物’을 감상하고 그것의 가치를 논하는 담론이 발전하였으며, 여기에 고증학적인 방법론이 더해져 박물학으로서 ‘物’을 탐구하는 경향이 생겼다. 또한 이 시기 지식인의 활동 범위의 확대로 외부 세계와의 접촉 또한 확대되었고 새로운 지식의 범람은 이것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욕구를 발생시켰다. 이러한 기록 의식이 당시 문단의 博學 추구 경향과 결합하여 새로이 인식하게 된 ‘物’을 문학을 통해 구현하려는 경향이 나타났으니, 이것이 ‘영물사’의 발달을 유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변화가 하필 ‘사’에서 발생하였을까? 그것은 이 시기 詞體에 대한 인식 자체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사는 이제 더 이상 여성적 언어를 통해 한을 표출하는 抒情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창작하는 행위 그 자체가 문인들 간의 사교와 유희, 학문의 경쟁의 수단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원인과 더불어 지식의 활용을 통한 사의 오락성을 재발견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관직에서 물러나 강남으로 돌아온 주이준은 더 이상 사를 쓰지 않았다. 이는 그가 전?후기사 창작을 통해 詞人에서 學人으로 점차 변화하는 과정을 거쳤고, 이 시기에 이르러 마침내 學人으로 그 정체성이 완전히 전환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실 주이준이 사 창작에서 보여준 일련의 변화는 주이준 개인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詞人 주이준의 문학적 변화를 가져온 그의 정체성 변화는 당대의 지식인 사회가 전반적으로 겪고 있었던 변화이기도 했다. 즉, 주이준과 그를 이은 절서사파가 사 창작을 통해 드러내었던 의식 세계는 명청 교체기의 과도기적 단계에서 ‘遺民 詞人’에서 ‘새로운 왕조의 學人’으로 변화해가는 중이었던 지식인 계층이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사가 청대 詞壇의 공감을 사고 호응을 얻어 널리 유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本論文的目的在於:通過考察淸代初期詞壇領袖朱?尊前、後期創作風格變化,以探討明?交際期江南知識分子正體性變化情況。在傳統中國上,以具有“漢族文化之中心”意義的江南地區,被異民族王朝交替的政治劇變而受到極大打擊。江南大多數的漢族知識分子,與其被文化程度比自己低的異民族統治,不如成爲了“遺民”。但是,隨著時間的推移,政治情況逐漸穩定,?朝對知識分子采取高壓、寬容政策而慢慢拉?到統一政府之內。本文將朱?尊的詞創作風格前、後時期變化,視爲同時期明?兩代交替時期江南知識分子變化結果。
朱?尊對詞創作的風格,從吐露“自我”內部情感,把焦點轉移到探討?記錄 “外部世界”。個人的“悲哀”削減,而轉換成顯耀知識?追求文學遊?。朱?尊的前期詞,極度擴大詞的抒情功能,可以用作家私人“悲哀的吐露”進行分析。本?究將區分爲:源於打破社會禁忌的愛情經驗的悲哀、以士大夫感受的悲哀、以及在過渡階段,通過集句模式的悲哀表現來進行了分析。
用“悲哀”情感爲主,以自我抒情爲創作爲目的的朱?尊詞,通過博學鴻詞科踏入仕途之時,轉變爲截然不同的詞風。可知朱?尊的後期詞風,從當時知識分子關注自我內部世界而吐露悲哀的“詞人”轉變爲?調文學上學問價??專注於?述知識的“學人”。這種現象以“詠物詞”的流行現象出現。
朱?尊的後期詠物詞,消失了前期詞風明顯出現的作者個人感情,替而代之的是敏銳地觀察、探討外部世界?進行記錄,以“學人之詞”爲其特征。此時期的朱?尊詠物詞,也廣泛探討各種事物屬性,?對事物進行全面的記錄,呈博物志特性。同時作家使用多種典故,以誇耀自己的知識?追求了文學遊?。從這方面來看,朱?尊的後期詞可視爲以“學問”作爲作詞重要因素的“學人之詞”。
朱?尊的後期詞,消失了之前的個人感情吐露,尤其是削減掉了遺民意識的原因,是與明?交替時期環境的局限性影響有關。如朱?尊這樣生活在過渡時期的人物,無法擁有確切的遺民意識,因此隨時蘊含著被新王朝所吸收的可能性。加上隨著時間的推移,維持生計的困難及想要參與現實政治的需求等原因,遺民意識會個更加減弱。或許他盡管留有遺民意識,?王朝的壓迫政策,無法使知識分子坦率地表現自己的感情。因此,當時的知識分子雖然喜歡南宋遺民的詞,但無法在詞作內容上與他們贊同。
在這種情況之下,認同漢族知識分子優越性的“博學鴻詞科”政策實施之後,遺民集團不得不被籠絡。其實,在這一時期,漢族知識分子熱衷於學問,是?棄對新王朝抵抗的遺民社會,想要保存僅剩的他們民族自尊--“文化優越性”的。在文學上追求學問的傾向,也可說是這些原因導致的。
朱?尊的後期詞創作集中於“詠物”的原因,也可以說是當時知識分子關注外部事物的緣故。從明代後期開始,逐漸形成脫離警?“物”的“玩物喪志”的看法,反而欣賞“物”,?且發展出討論其“物”的傾向,再加上考證學的方法論,?生了以博物學探討“物”的趨勢。而且,此時期的知識分子的活動範圍擴大,同時與外部世界的接觸也隨著增大,新知識的泛濫,導致了把這些知識整理、記錄的需求。這種記錄意識,與文壇追求的博學傾向結合而引導了“詠物詞”的發展。
那?,爲何這種變化偏偏發生在“詞”上??那是因爲此時期對詞體的認知本身發生了變化。詞,再也不是表現遺憾的抒情的手段,而是創造其詞的行爲本身具有作爲文人之間社交、遊?及競爭手段的意義。這不僅是政治上的原因導致的,而是提升詞價?的尊體策略變化導致的。就是說,在戰亂等困難狀況下,以詩表現悲哀,以詞在宴會上玩樂?歌頌太平盛世,分開詩與詞,從而賦予詩詞?存的必要性。
朱?尊在詞上表現的一系列變化,不僅僅意味著朱?尊個人的變化,是代表著當時知識分子整體的變化。這也是說明,導致這種文學上變化的朱?尊的精神上的變化,是當時知識分子所經歷的變化。因此可以說,朱?尊所顯示的意識世界,不僅是他個人的,也是明?交替過度時期,從“遺民詞人”轉變爲新王朝“學人”過程當中知識分子所共有的。因此,他的詞能?取得?代詞壇的共鳴而能?廣泛流行。

목차

제 1 장 서 론 1
제 1절 연구 동기 및 목표 1
제 2 절 선행 연구 검토 7
제 3 절 연구 범위와 방법 17
제 2 장 명청 교체기 강남 지역과 지식인 사회 29
제 1 절 강남의 문화적 의의와 유민의 발생 29
제 2 절 淸朝의 이중적 통치와 그 영향 35
제 3 절 문인 집단의 활동 범위 확대 41
제 4 절 강남 지역 詞壇의 동향 50
1. 明詞에 대한 반성과 尊體의 시도 51
2. 學古 경향과 南北宋 우열론 59
제 3 장 前期詞: 작자의 내적 비애 표현 64
제 1 절 愛情詞 창작을 통한 眞情의 추구 68
1. 자기 서사로서의 愛情詞와 眞情의 표출 71
2. 사회?윤리적 한계로 인한 비애 표현의 양상 96
제 2 절 사대부로서의 내면적 갈등 표출 120
1. 공간의 통시적 인식을 통한 유민 의식의 표현 121
2. 시간의 유한성 인식 131
3. ‘客’으로서의 동지 의식과 그 한계 141
제 3 절 과도기 단계의 詞: 集句를 통한 내면적 갈등의 제한적 표출 148
1. 詩句의 교묘한 배치를 통한 감정의 표현 155
2. 비애의 약화와 餘韻 추구 163
3. 博學 추구와 문학적 능력의 과시 168
제 4 장 後期詞: ‘學人의 詞’로의 이행 178
제 1 절 南宋 詠物詞의 선택적 수용과 비애 표현의 축소 181
1. ≪樂府補題≫의 발굴과 애호 181
2. 遺民詞로서의 성격 약화와 物我의 분리 184
제 2 절 ‘學人의 詞’로서의 성격 부각 195
1. 博物志的 성격 196
2. 탐구 대상으로서의 ‘物’의 문학적 형상화 216
3. 학식의 과시와 문학적 유희의 추구 237
제 5 장 朱?尊 詞의 前後期 변화의 의미 245
제 1 절 명청 교체기 小遺民의 불안정한 정체성과 표현의 한계 246
1. 유민 의식의 약화 246
2. 자기 검열로 인한 표현의 위축 252
제 2 절 ‘學人詠物’의 발전: ‘나’에서 ‘외부 세계’로의 초점 전환 258
1. ‘物’의 가치 발견과 인식의 변화 259
2. ‘세계’의 확대와 문학을 통한 기록 의식의 발달 268
제 3 절 詞體에 대한 인식과 尊體 전략의 변화: ‘空中傳恨’에서 ‘태평성대의 노래’로 277
제 6 장 결론: ‘詞人’에서 ‘學人’으로 284
【參考文獻】 292
【부록】 303
[부록1] ≪曝書亭集本≫과 ≪浙西六家詞本≫, ≪竹?太史手定詞稿本≫의 ≪江湖載酒集≫ 작품 배열 비교 303
[부록2] ≪曝書亭集本≫과 ≪浙西六家詞本≫, ≪竹?太史手定詞稿本≫의 ≪靜志居琴趣≫ 작품 배열 비교 321
[부록3] ≪曝書亭集本≫과 ≪浙西六家詞本≫, ≪竹?太史手定詞稿本≫의 ≪茶煙閣體物集≫ 작품 배열 비교 326
【中文摘要】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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