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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애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미술사교육학회 미술사학 美術史學 第49號
발행연도
2025.2
수록면
179 - 208 (30page)
DOI
10.14769/jkaahe.2025.02.4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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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낭산은 최고 높이가 해발 115m밖에 되지 않는 낮은 산이지만, 신라 왕경의 중심에 있고, 월성(⽉城)과 인접해 있어 특별하다. 예부터 신라인들은 이곳 낭산을 신성하게 여겼지만, 647년 선덕왕(재위 632-647)의 능이 낭산 정상에 조성되면서 신라인의 관심은 증폭되었다. 이후 이곳 낭산에 본격적으로 사찰이 들어서는데, 679년 낭산 남단에 세워진 사천왕사가 그 시작이다. 이후 북단에 〈구황동 삼층석탑〉(전 황복사지 석탑)이 축조되고, 서쪽 허리에 〈능지탑 사방불〉, 〈낭산 마애불〉, 〈낭산 석조관음보살입상〉, 〈낭산 석조십일면관음보살입상〉 등이 조성됐다.
이들 낭산의 불교 도상은 하나같이 새롭다. 3구가 한 조를 이룬 〈사천왕사 신장상〉도 동아시아에서 유례가 없으며, 〈구황동 삼층석탑〉에 납입된 것도 이전에는 없던 것이다. 〈구황동 삼층석탑〉 안에서 발견된 〈구황동 여래입상〉과 〈구황동 여래좌상〉은 손 모양도 특별하지만, 불상을 사리외함에 봉안하여 탑에 납입한 가장 이른 사례이기도 하다. 낭산 서쪽 허리의 〈능지탑 사방불〉도 특별하지만, 〈낭산 마애불〉의 두건 쓴 도상도 같은 사례가 없으며, 〈낭산 십일면관음보살입상〉 보관의 소면(⼩⾯) 배치도 이후의 십일면관음상과는 다르다.
한편 이들이 모두 낭산의 북, 서, 남에 위치해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낭산의 동편에는 사찰이 들어서지 않았다. 동편에도 공간이 충분히 있었음에도 사찰을 조성하지 않았다는 점은 낭산의 사찰이 모두 월성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낭산의 불교미술은 특정 시기에 집중됐다.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즉 문무왕부터 효성왕까지이다. 바로 이 시기 월성과 인접한 낭산이 중국 당으로부터 새로운 도상을 빠르게 전달받아 이전에는 없던 특별한 불교미술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낭산의 새로운 도상은 8세기 중엽 토함산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불교미술의 중심이 낭산에서 토함산으로 이동됐다.
잘 알려진 대로 경덕왕(재위 742-765)은 동악인 토함산을 특별히 주목했다. 경덕왕의 새로운 선택은 토함산이었고, 이곳에 국가사찰인 불국사와 석굴암(석불사)를 조성했다. 일본과 갈등을 빚었던 경덕왕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낭산이 아니라 동해와 인접한 토함산이었기 때문이다. 8세기 중엽, 신라 불교미술의 중심이 낭산에서 토함산으로 이동되었지만, 아쉽게도 낭산의 불교 도상은 토함산으로 전이되지 않았다. 기존 틀을 바꾸려는 의지가 강했던 경덕왕은 토함산에 기왕의 낭산 불교 도상이 아닌 당에서 새롭게 들여온 도상을 담았기 때문이다. 경덕왕의 의지도 있었지만, 석굴암의 특별한 구조, 그리고 8세기 중엽, 급부상한 화엄과 토함산과의 긴밀한 관계 역시 이곳 토함산에 새로운 불교 도상이 담기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낭산의 새로운 불교 도상들
Ⅲ. 낭산이 선택된 이유, 그리고 그 후
Ⅳ. 맺음말: 낭산에서 토함산으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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