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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하정민 (서울대학교)
저널정보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미술사와 시각문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제20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8 - 67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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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불비상(佛碑像)’은 곧게 세워진 판형(板形) 또는 방형(方形)의 석재에 불보살(佛菩薩)이나 석가모니 불전(佛傳) 및 본생담(本生譚)의 장면, 혹은 불교 관련 상징물의 이미지를 부조로 새긴 시각적 조형물을 의미한다. 이러한 불비상은 ‘불교조상비(佛敎造像碑)’라고도 불리며, 중국에서 약 5세기 후반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7세기 초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중국의 불비상은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5세기 불교도들이 중국 전통적인 석비(石碑)의 형태에, 중국 외부에서 들어온 새로운 종교인 불교 이미지들을 결합시켜 제작한 조형물이다. 불비상에 차용된 중국의 전통적인 석비 형태는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것으로, 한족(漢族) 문인들이 서한(西漢, 기원전 206년-기원후 9년)대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한대(漢代) 한족 문인들이 제작한 석비의 표면은 화면 가득 특정 인물이나 사적(事蹟)을 기념하거나, 유교적 사상 및 이상을 표현한 문자로 채워졌다. 이러한 중국의 전통적인 석비는 인도로부터 불교가 전해지면서 그 표면의 시각적 구현 방식이 완전히 변화하였다. 표면 가득 새겨진 한자 텍스트는 불교와 함께 인도에서 들어온 여러 불교 존상들과 상징물들의 이미지로 대체되었다. 한편 불교조상비가 활발히 제작되던 무렵인 6세기 중반에, 불비상의 비면을 가득 채우던 불교 조상이, 불교 관련 텍스트로 변화되는 움직임이 감지되는데 이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이러한 양상을 보여주는 예들은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하북성(河北省) 등의 일부 지역에서 발견되는데, 석비의 전면 가득 불교 경전에서 가져온 내용을 한자로 새겨 넣었으며, 불보살의 이미지는 없거나 매우 적은 비중으로 제한되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조형물을 ‘불교 각경비(刻經碑)’ 혹은 ‘불비(佛碑),’ ‘불교 석비’로 지칭함으로써, ‘불비상’또는 ‘불교조상비’와 구별하고자 한다. 텍스트 중심의 불교 각경비는 중국의 전통적인, 특히 한대의 유교적 배경 하에서 제작된 석비와 시각적으로 매우 유사하다.그러나 비면에 새겨진 글의 내용은 완전히 변화하여, 중국 외부에서 들어온 종교인 불교의 교리 및 사상이 담겼다. 본고는 중국의 전통적 석비의 형태를 차용하여 발전시킨 5-6세기의 불교조상비와 6세기 중엽에 나타난 불교 각경비에서 그 시각적 구현의 중심이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그리고 다시 이미지에서 텍스트로 옮겨간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이러한 변화를 이끈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중세 중국 사회에 존재했던 ‘중국적’인 것과 ‘비중국적’인 것 사이의 비가시적인 경계를 들 수 있다. 먼저, 유교적 맥락에서 제작된 중국의 전통적인 텍스트 중심의 석비를 이미지 중심의 불교조상비로 변화시킨 것은 5세기 후반 북위(北魏)시대의 비한족 불교도들이었다. 이 변화는 당시 중국의 시각문화를 크게 바꾼, 인도에서 유입된 ‘비중국적’인 불교 조상들의 표현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이후 불교 이미지 중심의 불비상에서 불교 경전의일부분을 새겨서 표현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석비는 6세기 중엽에 일부 지역 한족 불교도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러한 텍스트 중심의 불교 각경비는 시각적으로 한대의 전통적인 석비로 회귀하는 듯 보인다. 이들 6세기의 불교 각경비는 당시 불교미술의 주류는 아니었다. 현전하는 유물들을 살펴보면, 불보살의 이미지가 그 표현의 중심이 되는 불교조상비 혹은 불비상으로 여전히 활발히 제작되었으며, 텍스트 중심의 불교 석비는 일부 지역에서 적은 수로 제작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각경비들의 출현은 한족 불교도들에게 ‘중국적’인 것과 ‘비중국적’인 것을 분별하는 사고가 존재했으며 문화적으로 ‘중국적’인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6세기 후반 산동성 추성(鄒城)시 철산(鐵山)에 새겨진 거대한 불교 각경비와 그 각경제기(刻經題記)는 발원자의 한족 혈통을 설명해 주고 있으며 그들의 전통에 대한 존경심과 해박한 지식을 드러내고 있어서 이러한 경향을 알려주는 매우 중요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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