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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병철 (경상국립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90호
발행연도
2024.9
수록면
173 - 201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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息庵 黃暹(1544~161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73년이라는 생애에서 절반이 넘는 37년 동안이나 관직을 수행했다. 더욱이 그가 병조참의가 된 1591년의 이듬해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황섬은 宣祖를 모시고 義州를 향하는 도중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고 때로는 東宮을 호종하기도 했다. 또한 募運使에 임명되어 군량을 조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다른 한편으론 時弊를 지적하고 대책을 건의하여 전쟁의 상황 속에서 직면한 여러 문제점을 타개하고자 노력했다. 특히 황섬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무관의 인사제도, 수령의 파견, 수비의 방안, 재정의 낭비, 변방의 기강 등 산적해 있는 문제점들을 거론하면서 국가 체제의 근본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자 분투했다. 그의 삶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이런 면모 때문일까? 星湖 李瀷(1681 ~1763)은 황섬의 행장을 찬술하면서 매우 많은 분량으로 정책 건의와 관련된 내용을 기술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제안한 정책에 주해를 달듯이 事案別로 자신의 견해를 개진했다. 이익은 어떤 인물의 주요 행적, 학문 성과, 문학 특징 등을 개괄하여 서술하는 전기적 방식에서 벗어나 황섬의 정책 건의에 초점을 맞추었는데, 두 사람 사이에 150년이 넘는 시간적 격차가 있음에도 국가 체제의 문제점을 개혁하고자 하는 측면에서 서로 간의 공통적 관심사가 일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은 이익이 주목한 관점에 근거하여 임진왜란 전후 시기 황섬이 거론한 당시의 시폐 및 개선안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가운데, 황섬의 정책 건의에 관한 이익의 견해를 함께 살펴보았다. 황섬은 東西南北으로 당파가 분열되는 매우 혼란한 상황에서 관직을 수행해야 했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시련을 극복하고 무너진 국가 체제를 복구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황섬이 제기한 시폐와 대책을 통해 임진왜란 전후 시기의 공노비의 身貢, 장수의 인사제도, 수령의 선발, 비변사 운영의 강화, 지방의 사치 풍조, 邊將의 군기 문란, 속오군의 賞給 제도, 교육 기관의 복구 과정, 빈청강 시행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비록 황섬의 정책 제안이 당대에 전부 받아들여질 수도 없었고 모두 시의적절하고 실현 가능한 방법이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근간을 새롭게 일으켜 세우고자 한 그의 노력과 실천은 오늘날에도 기억해야 할 역사적 가치를 충분히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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