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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진정환 (국립중앙박물관)
저널정보
전북사학회 전북사학 전북사학 제71호
발행연도
2024.7
수록면
5 - 3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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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목적은 후백제 정체성과 국내 통치 전략의 변화가 외교의 대상과 시기 선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를 검토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해 건국 당시 내건 후백제의 정체성이 920년 중반 대외 성과를 바탕으로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먼저 살폈다. 그에 따른 후백제의 외교정책이 무엇이었고, 동아시아 정세 변화에 따라 후백제가 어떻게 대응했는가를 살펴보았다. 일반적으로 후백제가 중국은 물론 일본과도 활발하게 교류했다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건국 당시 ‘백제의 계승자’를 자처한 후백제는 오월이 908년 ‘천보’로 개원하자, 백제와 남조 양이 그랬던 것과 같이 오월과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하였다. 922년 일본에 접근한 것도 고려의 ‘고려-오-민’ 삼각 동맹에 맞서 옛 백제 때의 구축되었던 ‘남조-백제-왜’의 외교관계를 재건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920년대 전반 백제 계승을 완수한 후백제는 925년 무렵부터 ‘신라의 대체자’이자 ‘통일의 완성자’로 국가 정체성을 바꾸었다. 이를 인정받기 위해 기존의 오월과의 교류에 더해 후당과 조공-책봉 관계를 구축하였다. 한편, 927년 거란, 929년 일본과의 교섭은 상대국이 먼저 접근한 것에 대한 대응이었을 뿐 후백제가 능동적으로 펼친 외교 교섭이 아니었다. 이는 오히려 후백제가 오월·후당 교섭에 천착했음을 보여 주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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