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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종미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저널정보
동방한문학회 동방한문학 동방한문학 제98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119 - 158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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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答宋伯純」과 「藏淸軒記」를 대상으로 兩宋 가문 간의 갈등을 살펴봄으로써 仲裁者 金昌翕의 면모를 조명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고찰을 시도하는 이유는, 정치적ㆍ사회적 인간인 김창흡을 부각하기 위해서이다. 양송 가문 불화의 불씨는 1703년 여름에 權尙夏의 문인인 申愈가 초고한 師門 辨誣疏에 등장한 “宋浚吉이 놀랍게 여기고 한탄했다는 것이 宋時烈에게 무슨 상관입니까”라는 내용에서 비롯되었다. 양송 가문의 후손들 사이에서 불화가 벌어지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말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 때문이었다. 송시열 측 인물 신유는 송준길이 당대에 강한 권세를 갖고 있던 李景奭을 두려워하여 그에게 순종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고 해석하였고, 宋夏績을 비롯한 송준길 문인들은 송준길의 그 말에 대해 시국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였을 뿐이지, 이경석에게 치우치려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문을 위해서 1703년 하반기부터 1705년까지 통문을 보내 상대방을 토벌하려고 했다. 결국은 1705년 7월 이후 송시열의 증손 宋一源이 검담서원에서 유벌을 입고 말았다. 그 뒤에도 양송 가문 간의 싸움이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양송 가문의 관계는 원점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양송 가문과 밀접한 혼척 관계에 있던 김창흡은 이 일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다. 양송 가문의 불화를 조정하기 위해 김창흡은 이 다툼에 앞장선 인물인 송일원과 송하적에게 각각 편지와 기문을 보냈다. 두 글에서 김창흡은 그들이 은진송씨 가문의 후손이며 兩先生의 전통을 잘 이어받았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師門是非를 따지지 말고 ‘時義’를 잘 판단하여 ‘顯晦語默’의 도를 지키면서 마음을 수양하라고 권유하였다. 김창흡이 양송 가문의 불화를 중재한 심층적 의도는 노소론 간 공방전이 치열하던 18세기 초의 정국 속에서 유리한 국면을 차지하기 위해 노론 내부의 단합을 도모하려던 것이었다. 이 사건의 전말을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고 이에 대한 김창흡의 반응을 조명하는 것은 본고에서 처음 시도하는 작업이다. 이는 김창흡과 그를 둘러싼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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