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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호걸
저널정보
한국영화학회 영화연구 영화연구 제100호
발행연도
2024.06
수록면
115 - 149 (35page)
DOI
10.17947/FS.2024.6.1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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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960년대의 액션 스타 중 한명인 장동휘에 대한 것이다. 그의 배우로서의 사회적 삶의 궤적의 개요를 작성하고, 이를 산업적⋅사회적 견지에서 상술하는 것을 과제로 한다. 그의 경력은 악극무대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1943년 라미라가극단의 〈아리랑〉 공연의 주역을 맡으면서였다. 해방과 전쟁을 거치며 악극단 활동을 이어가던 그는 영화 〈아리랑〉(1957)의 주역으로 발탁되며 영화로 전환했다. 이후 여러 유형의 악역을 소화하며 영화배우 활동을 하던 중,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의 성공을 계기로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 후 다양한 액션영화에서 주연 혹은 비중 있는 조연으로 출연하며 스타의 위상을 이어갔는데, 특히 구형활극으로도 불렸던 대륙물에서의 활약이 대표적이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까지는 종로나 명동을 배경으로 하는 협객물의 보스 역으로 주로 등장하며 배우 경력의 후반기를 통과했다. 그는 액션스타로서의 성공가도를 달리던 1965년 동료 액션 스타들과 함께 설립했던 ‘동인영화사’의 대표로 활동하기도 했고, 1974년에는 영협 연기분과위원장으로 선출되어 1980년대 초까지 그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배우로서의 그의 경력은 미디어 환경의 급속한 변동에 겹쳐지는 것이었다. 그가 배우활동을 시작한 악극은 195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히 몰락하며 영화에 그 위상을 넘겨주었고, 그가 전성기를 누렸던 영화는 1970년대가 되자 TV의 등장으로 인해 급속도로 위축되었다. 이러한 환경 변화의 중요한 단계마다 그는 선택의 결단을 내려야 했는데, 첫 번째 선택이 영화로 이동하는 것이었던 반면, 두 번째 선택은 영화에 남는 것이었다. 이는 영화배우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개인적 선택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미디어 장의 급속한 변동속 한국영화사의 한 단면이기도 했다. 300여 편이 넘는 영화들에서 그가 연기한 배역들은 특정한 모습의 페르소나로 수렴하는데, 이는 폭력적인 실천력으로 가족과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는 구세대 가부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는 〈아리랑〉의 서사가 탈-식민 냉전기의 신생 민족국가의 조건 속에서 새롭게 쓰이는 것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구형의 액션스타로서 장동휘는 그 과정에서 나운규로부터 이어져 온 남성 스타 페르소나를 계승함으로써 당대 한국영화사의 주요한 일부가 될 수 있었다.

목차

국문요약
1. 서론
2. 장동휘의 일생: 사회적 삶의 궤적
3. 장동휘의 영화사적 위치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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