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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현지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53집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521 - 54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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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조선후기 국가와 국왕이 신하를 현창하는 데 시호를 활용하며 발생한 다양한 양상을 검토한다. 증시<SUB>贈諡</SUB>의 마지막 절차인 선시<SUB>宣諡</SUB>와 연시<SUB>延諡</SUB>는 본래 시호 교지를 반사<SUB>頒賜</SUB>할 때 연이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의례적이고 사치스러운 행사로 인식되어 온 경향이 있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대신의 사망 직후 초상을 치르는 가운데 시호 수여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시례<SUB>賜諡禮</SUB>라는 형태로 간소한 의식만이 이루어졌다. 그러다 17세기에 이르러 삼년상까지 끝난 이후 시호가 결정되는 사례가 늘어나며 더 이상 흉례<SUB>凶禮</SUB>가 아닌 길례<SUB>吉禮</SUB>로 연시례가 거행되기 시작하였다.
연시는 처음 왕족과 외척에게 행해지다 점차 대신과 충신에게도 확대되었다. 숙종대 이후 죽은 지 오래된 이전 시대의 인물에게 추시<SUB>追諡</SUB>하면서 시호 결정과 반사가 시기적으로 분리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이 과정에서 가문이 몰락하여 후손을 찾을 수 없거나, 후손이 있더라도 시호 교지를 맞이할 수 없는 처지의 인물에게도 시호를 내리기 위해 선시와 치제<SUB>致祭</SUB> 등을 활용하는 양상을 띤다. 이렇듯 국가가 시호 반사를 주도하면서 대대적인 행사를 지원한 것은 신료와 백성들에게 헌신과 충을 사회적으로 제시하고 강조하고자 한 것이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17세기 연시延諡의 등장과 추시追諡의 증가
3. 18세기 선시宣諡 양상과 현창 범위의 확대
4.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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