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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용태 (동국대)
저널정보
한국사학회 사학연구 사학연구 제152호
발행연도
2023.12
수록면
93 - 122 (30page)
DOI
10.31218/TRKH.2023.12.15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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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의 승군(僧軍), 즉 의승(義僧)은 의병(義兵)과 마찬가지로 국난을 이겨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 정부나 유생(儒生)이 주도한 기억과 추숭의 장에서는 의병에 비해 의승의 비중이 현저히 낮았다. 그럼에도 청허 휴정(淸虛休靜)과 사명 유정(四溟惟政) 등 대표적 승장(僧將)에 대해서는 18세기에 들어 충의(忠義)를 기리는 표충사(表忠祠)가 지정되고 추모 향사(享祀)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 글에서는 조선의 의승을 둘러싼 담론에 주목하여 그동안의 연구를 정리해 보았다. 의승 활동은 근대기에 학술적 관심의 대상이 되었는데, 승군을 이끈 승장 관련 연구는 191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해방 이후에도 의승은 호국불교의 상징으로 인정되었으며, 승군 활동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과 충의 사이의 딜레마를 내포하기는 했지만 유교사회에서 요구되는 충의의 선양, 불교의 자비(慈悲) 정신의 발현 등으로 해석되었다.
임진왜란 의승 활동은 불교가 조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지분을 갖고 나름의 역할을 하게 되는 전환적 계기가 되었다. 전쟁 이후 승군의 효용성이 부각되면서 승군과 승역(僧役)이 제도화되고 승도와 사찰의 존립 기반이 굳건해졌다. 승려는 공민(公民)의 자격과 의무를 갖게 되었고 사찰은 국가재정 운영 시스템 안에 편입되어 주어진 역할을 했으며 그에 상응하는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는 의승 활동이 남긴 유산으로서 그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임진왜란 의승군과 승군의 연구사적 조명
Ⅱ. 의승장에 대한 기억의 형상화와 평가
Ⅲ. 추숭의 상징 표충사 사액의 역사적 의미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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