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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범 (공주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52집
발행연도
2023.11
수록면
151 - 195 (4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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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 금산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를 금산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기억을 전승하고 칠백의총의 조영을 통해 이를 계승하여 지금의 성역화에 이르렀는가를 추적한 것이다. 선행 연구는 주로 금산 전투의 전개 과정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조헌과 영규를 중심으로 하는 의병의 활약상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이후 형성된 칠백의총에 대해서는 박정희 정권 당시에 성역화 과정을 통해 지금에 이르는 과정만을 설명하고 있다. 금산전투 이후 성역화의 과정에 이르는 수백년의 역사 잊혀진 셈이다.
초기 칠백의총은 조헌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일군순의비를 통해 조헌과 그 의병을 추모하였다. 그러나 금산지역민을 중심으로 제단과 종용사가 건립되면서 금산 지역에서 임진왜란 당시 순직한 의병과 관군이 함께 포함하게 되었다. 영규, 고경명, 변응정이 그러한 경우이다. 이들이 함께 모셔지면서 칠백의총은 종용사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금산 지역의 대표적인 사우祠宇가 되었다.
칠백의총과 종용사는 주변 지역의 사족들에게 임진왜란을 기억하고 재생하는 공간이 되었다. 칠백의총에 대한 시문을 보면 임진왜란 전투에서 의병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종용사에 직접 참배하여 이들의 활약을 기리기도 하였다. 점차 칠백의총과 종용사는 의병을 기억하기 위한 추모와 순례의 공간이 되어 갔다. 금산 지역만이 아니라 조선의 의병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칠백의총과 종용사의 수난은 1940년대에 발생하였다. 일본인 경찰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파괴가 이루어졌다. 이는 종용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헌의 일군순의비, 고경명 비문, 영규의 비문 등이 모두 파괴되었다. 이 시기 추모는 끊어지게 되었다. 해방 직후 지역민을 중심으로 다시 제향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52년 당시 추모 열기는 매우 컸다. 성역화 과정은 박정희 대통령이 순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순의제향의 일자가 정비되었고, 칠백의총의 경내는 성역화 되었다. 이제 제향의 주체는 지역민에서 국가로 바뀌게 되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금산전투 제향 공간의 형성
3. 금산전투 기억의 전승과 기록
4. 종용사의 운영과 국가 제향
5. 일제시대 수난과 해방 이후 성역화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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