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질문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출판부 신학정론 신학정론 제41권 제1호 (통권 제80집)
발행연도
2023.6
수록면
509 - 541 (33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질문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프랑스 개혁파 교회의 성도들인 위그노는 개신교회를 박해하는 프랑스의 왕과 가톨릭 세력에 압박과 핍박을 받았다. 1598년 앙리 4세의 낭트 칙령을 통해 그들은 제한적인 자유를 갖게 되었지만, 절대왕정을 꿈꾸던 루이 14세는 1685년 낭트 칙령을 페지하는 퐁텐블로 칙령을 공포하여 다시 위그노들을 강력하게 핍박했다. 그 결과 많은 위그노가 신앙의 피난민으로 조국을 떠나야 했다. 그들이 떠났던 대표적인 피난지 중 하나가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베를린이다. 브란덴부르크는 30년 전쟁으로 인해 영토가 피폐해졌고, 인구도 크게 줄어 경제적으로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개혁파 신앙을 가진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1685년 포츠담 칙령을 통해 곤란에 빠진 프랑스 개혁파 교회의 성도들, 즉 위그노를 공식적으로 난민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대선제후가 포츠담 칙령을 공포하여 위그노를 받아들인 이유는 우선 대선제후와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위그노를 보호하겠다는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에 더하여 위그노들의 뛰어난 경제적 능력을 통해 브란덴부르크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하는 정치-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베를린에 정착한 위그노들은 많은 특권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의 정착 과정이 항상 원만하지는 않았다. 원주민들과 마찰을 비롯한 어려움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으로 위그노의 개혁파 교회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위그노와 베를린은 점차 서로 동화되었다. 문화와 경제적 엘리트로 인정받았던 프랑스 위그노와 그들의 문화는 베를린의 발전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목차

초록
Ⅰ. 서론
Ⅱ. 포츠담 칙령과 위그노들의 베를린 이주
Ⅲ. 결론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이 논문과 함께 이용한 논문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

UCI(KEPA) : I410-ECN-0101-2023-231-001493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