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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미선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호남문화연구 제58호
발행연도
2015.12
수록면
187 - 217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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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 도암면 대초리에 위치한 운주사는 도선이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하지만 실제 운주사 창건은 빨라도 11세기 경의 일이고 도선은 9세기 인물로, 17세기 후반 조선후기의 설화가 역구전된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운주사의 창건에 대한 최초의 설명으로 운주사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있다. 이에 본 연구는 폐사를 겪었던 운주사가 현존할 수 있게 된 배경을 도선의 행주론을 통해 검토하였다. 도선의 풍수비보는 산천을 특정 형세로 비유하고, 풍수적으로 결함이 있어 길지가 아닌 땅은 사찰, 탑, 불상, 당간을 설치하여 고쳐 쓰고, 부족한 부분은 더하거나 북돋아 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이러한 도선의 풍수비보는 고려 건국과 함께 국가적 차원에서 활용되어 고려시대에는 대부분의 사찰이 이에 의거하여 창건되었다. 하지만 고려말 공양왕대 비보사찰의 의미가 약화되고, 조선건국 후 숭유억불정책의 일환으로 불교의 교세가 약화되던 중 정유재란이 발생하면서 운주사는 폐사되었다. 하지만 폐사 이후에도 운주사는 면면히 그 맥을 유지해 나갔다. 운주사의 중요성은 ‘호국’의 이념이 잠재되어 있었다. 조선후기 불교교단의 자기 정체성 찾기의 일환에서 고승비문이 찬술되었는데, 도선의 비문 역시 이때에 찬술되면서 운주사의 창건이 행주형국의 지세를 비보하기 위함이라고 설명되었다. 이러한 행주론은 17세기 전쟁, 북벌정책, 경신대기근 등 국내외 위기 상황에서 ‘호국’의 맥락으로 수용되기 용이한 것이었다. 19세기에는 행주론에 대한 인식이 주변 사찰의 승려들과 관청에 의해서 공유되면서 약사전의 창건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국가적 지원이 없고, 승려 개인의 적극적 활동이 사라지면서 다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20세기에 운주사는 다시 부활하게 된다. 이전의 ‘호국’의 측면에서 운주사의 유래를 설명한 행주론은 신비하고 신이한 창건 방법에 대한 다양한 설화가 덧붙여지게 되었다. ‘호국’ 자체보다는 현존하는 신비한 천불천탑의 창건 방법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이는 당시 관광객의 유입과 수요를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일제는 문화유적 조사와 공휴일 지정 등의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관광객의 증가로 이어졌는데, 명승지로서 운주사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위해 ‘행주론’이 향유층을 겨냥하여 흥미로운 사실들을 첨입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조선의 산천 형세를 통해 조선 민족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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