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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동석 (성균관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16.3
수록면
225 - 25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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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조선과 청나라 문인의 교류와 특징을 살펴본 글이다. 특히 교류가 중점적으로 일어난 북학파시기와 그들의 후손인 19세기 북학파 후예들의 청나라 문인과의 교류를 중점으로 고찰하였다. 조선에서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배청 사상이 팽배해졌다. 1704년(숙종 30) 조정에서는 창덕궁 안에 大報壇을 설치하였고, 국왕은 임진왜란 때 도와준 明나라 神宗을 기리기 위하여 참배했으며, 정조 때에도 여전히 대보단에 참배했다. 왕실은 이러한 분위기였지만 조선 문인들과 청나라 문인들은 끊임없이 교류를 하였다. 17세기 말 三藩의 난이 진압되고 나서 강희는 내치에 자신을 가지고 유화정책을 펴게 되자 조선 문인은 청나라 문인과 이전보다는 비교적 자유롭게 교류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문인이 청나라 문인과 폭넓게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1770~1780년 사이에 『사고전서』가 출판되면서 전국에 있는 선비들이 유리창에 모이면서다. 이미 1680~1690년 사이에 『명사』를 편찬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북학파가 출현하게 되는데, 1765년 홍대용을 이어 1776년 유득공의 숙부 柳琴이 북경에 다녀오고 이어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박지원 같은 문인들이 활발하게 활동한다. 인적 교류는 청나라 학술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8세기 말 조선에서는 宋學과 漢學의 논쟁이 있었다. 1781년 『四庫全書簡明目錄』이 완성 되자 조선에서는 『奎章總目』을 편찬하고, 한학 위주의 『四庫全書簡明目錄』을 비판하게 된다. 한편 조선 문인들은 송학을 주장하는 桐城派 문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하기도 한다. 이후 今文經學을 토대로 하는 公羊學의 실체를 알게 되었다. 아편 전쟁을 전후로 하여 만주족 정권의 취약점이 노출되자 청나라 문인들은 고염무의 經世致用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이에 고염무사당을 수리하고 참배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기도 한다. 조선 문인은 이들과도 교류하였다. 박제가 뒤에 활동한 이상적은 12차례나 북경을 방문하여 광범위한 인맥을 구축하였고, 이를 중심으로 양국 인사들의 교류는 더욱 발전하였다. 교류 인물이 많고 연구 성과도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김영작과 이백형, 이상적과 공헌이 같은 중심인물의 특별한 인연도 살펴보았다. 조선 문인은 청나라 문인과 교류하면서 조선의 당색이나 학문에 대하여 이야기 했으며 저작물을 주고받기도 했다. 또한 조선 문인들은 조선 문화에 청나라 문화와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청나라에서는 布衣가 王公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관료라도 시장에 가서 상인들과 물건을 흥정하였다. 교류 공간도 유리창 書肆를 중심으로 法源寺와 松筠庵, 衍聖公邸 같은 곳에서 주로 모였고 宣武門 남쪽의 漢人 집성 지역을 비롯하여 謝疊山祠, 報國寺, 顧炎武祠堂, 慈壽寺 같은 곳에서도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 조선 문인과 청나라 문인의 인물 교류는 수백 명에 이를 정도로 광범위하지만 중요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주자학 중심의 宋學을 위주로 하는 조선의 문인들은 桐城派의 費蘭?와 梅曾亮, 吳嘉賓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였다. 그리고 공자의 嫡孫에게 세습되는 衍聖公과 연성공 주변에 있는 인물과도 지속적으로 만났다. 阮元을 비롯하여 王鴻, 72대 연성공 孔憲培, 73대 연성공 孔慶鎔, 孔憲彛, 공헌이 주변의 친구들을 집중적으로 만나거나 교류하였다. 청일전쟁이후 조선과 청나라는 국교가 단절되지만, 망명했던 해외 지식인들은 공자의 사상을 주창하는 孔敎會 인사들이나 공자의 후손을 만났다. 李炳憲은 康有爲와 교류하면서 今文經學을 받아 들여 孔敎會활동을 하였다. 조선 문인들은 청나라 문인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성향과 학파별, 지역별 특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주자학 중심의 조선 문인들은 초기 한학을 비판의 대상으로만 삼다가 점차 청나라 학술의 본령을 이해하면서 한학과 대립관계에 있었던 동성파 문인들과 교류했고, 지속적으로 공자 후손과 관련된 인물을 만났으며, 공자의 사상을 주창하려고 했다. 이는 독특한 조선 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조선과 청나라 문인의 교류에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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