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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재복 (경동대학교)
저널정보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문화와예술콘텐츠연구소 문화와 예술연구 문화와 예술연구 제10권
발행연도
2017.12
수록면
267 - 28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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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오정(王子午鼎)>은 기물의 모양이 독특하고 문양은 실랍법(失蠟法), 명문은 조충서(鳥蟲書)를 사용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선행연구에서는 주로 무덤주인, 제작연대, 내용분석에 치중하였는데, 본고에서는 이를 토대로 <왕자오정> 명문의 내용과 기물의 주인, 그리고 명문에 나타난 서체미에 대해 집중적으로 고찰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도출해 내었다. 첫째, <왕자오정> 본체의 명문에 영윤자경(令尹子庚)이란 명칭을 통해 왕자오(王子午)가 영윤으로 있던 기원전 558~552년 사이에 열정(列鼎)을 주조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그 덮개에 보이는 붕(?)은 자경과 자남(子南)의 뒤를 이어 영윤(令尹)이 된 위자붕(蔿子馮: 楚叔之孫?)으로, 어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이 기물을 획득하여 덮개를 추가로 만들고, 기원전 548년에 죽으면서 자신의 무덤(M2)에 부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둘째, 춘추 5패(覇) 중의 한사람인 초나라 장왕(莊王)은 9정(鼎)에 대한 고사로 유명하다. 그의 아들인 왕자오는 자신의 신분보다 한 단계 높은 7점의 열정을 주조하여 당시 초나라의 국력이 막강하였음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 <왕자오정>과 같이 화려한 청동기가 보이지 않는데, 이는 상대적으로 인문정치가 미약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셋째, 조충서는 춘추전국시기에 장강 중하류지역에서 크게 유행하여 중원지역에까지 영향을 주었는데, 오(吳), 월(越), 초(楚), 서(徐), 증(曾), 채(蔡), 송(宋) 등의 여러 제후국에서 주로 발견된다. 춘추시기에서 조충서는 무기류에서 주로 확인되고 용기에는 극히 드물다. <왕자오정>은 현재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조충서의 명문으로 그 사료적 가치뿐만 아니라 서법예술에서도 상당히 수준 높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춘추시기 초나라 문화권에서는 세로의 길이가 긴 장방형 결구를 선호하고 있다. <왕자오정>의 명문도 이러한 결구를 취하고 있는데, 본체의 복부에는 조충서로 14행 84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고, 덮개에는 장방형의 대전(大篆)으로 4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기물 본체는 왕자오가 만들고 덮개는 위자빙이 만들었기 때문이며, 덮개를 추가로 만드는 과정에서 좀 더 고풍적인 장방형의 전서를 선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왕자오정>은 동시기 청동예기 중에서 기물의 제조방법과 명문의 서사방식이 매우 빼어난 것으로 예술적 가치가 높은 최고의 걸작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당시 초나라 왕실과 국제정세를 알 수 있는 청동기 유물이며 조충서의 초기적인 형태로 조충서의 형성과 변화양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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