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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원영상 (원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 제68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105 - 127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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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고대 후반에 유입된 천태종은 중세 신불교 탄생의 요람이 된다. 천태종의 역할은 사실상 근현대 다양한 불교계 신종교의 출현에 이르기까지 일본불교의 저변에서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종합불교로서 신앙과 수행의 폭넓은 세계를 갖고 있음으로 인해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 천태종은 사이초(最澄, 766~822)에 의해 확립되었다. 그는 중국에 유학하여 원?선?계?밀(圓禪戒密)의 4종(宗)을 계승했다. 귀국해서는 밀교를 도입하여 완전한 종합불교를 만들고자 했다. 또한 국가로부터 독립된 독자적 대승교단 구축을 위해 평생을 노력했다. 천태종을 일본에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사이초는 많은 난관에 봉착했다. 대표적인 사건이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남도불교(南都佛敎)의 대표주자인 도쿠이츠(德一)와의 논쟁이다. 불성론(佛性論)을 둘러싼 논쟁에서 사이초는 심혈을 기울여 『법화경』의 정신에 의거한 일승(一乘)사상을 주장했다. 말년에 나온 많은 저술은 이러한 법화사상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다. 핵심은 모두가 성불할 수 있다는 개성불도(皆成佛道) 사상이다. 일본 불교의 역사를 놓고 본다면, 결국 사이초가 주장한 법화사상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사후이기는 하지만, 기성불교계와 국가불교로부터 독립을 성취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밀교와 더불어 종합불교의 양 축을 건설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사이초는 법화사상에 기반한 수행체계를 통해 대승불교의 정신을 확산시키고자 했다. 그가 「산가학생식(山家學生式)」에서 “나라의 보물을 무엇인가. 그 보물은 도심(道心)이다. 도심 있는 사람을 국보라고 한다”라고 한 것에 잘 나타나 있다. 이 도심은 바로 대승불교의 보살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위해 비예산(比叡山)에 학당(學堂)을 세우고 대승의 계율을 확립했다. 후대에 사이초의 법화종단은 그가 대립했던 기성불교계와 마찬가지로 왕권과 밀착하고 마침내 분열되기는 했지만, 여러 조사들에 의해 시대를 따라 늘 새롭게 해석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일본 불교의 사상적 저수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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