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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세동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79호
발행연도
2021.12
수록면
201 - 22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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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홍래가 살았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는 조선 왕조가 무너지고, 국토가 식민지가 되는 변혁의 격동기였다. 본 논문은 이 격동기에 조선의 백성으로 태어나 일본의 신민으로 살기를 요구받았던 한 선비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글이다. 그는 일본의 신민이기를 거부하고 조선의 처사로 남기를 원했던 지식인이었다. 일본의 신민이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 시대 이 땅의 보편적인 정서였지만, 누구나 다 처사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처사는 올바름을 닦고 덕을 길러 시대가 부여한 사명을 묵묵히 수행하며 바른 길을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송홍래는 분명 처사였다. 그는 올바름을 닦기 위해 스승들을 찾아다녔다. 그는 스승들을 찾아다님에 있어 학파와 색목을 구분하지 않았다. 장복추와 이종기는 執贄를 통해 맺어진 그의 훌륭한 스승들이었으며, 김흥락과 김도화, 장승택과 김형모, 한주학파의 곽종석과 이승희와 장석영, 기호학파의 전우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명망가들이 모두 그의 집지하지 않은 스승들이었다. 그는 이 스승들에게 배워 덕을 기르고 학문을 익혀, 스스로 또 다른 스승이 되었다. 그의 제자들은 이 새로운 스승의 학문과 덕행에 감동해, 자원하여 學舍를 세우고 계를 만들었으며, 그의 장례 때에는 100여 명이 제자로서의 상복을 입었다. 그 제자의 후손들은 현재까지도 격년으로 釋菜禮를 거행하며 회천의 학덕을 기리고 있다. 그는 시대가 요구하는 바른 길을 알고 실천한 사람이었다. 유학의 맥을 면면히 이어온 조선의 선비로서 세계만방에 조선의 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에 서명하였다. 목숨을 담보해야 할지도 모르는 이 일을 올바름[義]을 지키기 위해 과감하게 실천함으로써, 136명의 동지들과 함께 조선 유림의 대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의 처사인 것이다. 그는 성리학자라고 할 만한 전문적인 글들을 집필하지는 않았지만, 조선 학술의 근간이었던 성리학에 대한 입장은 분명했다. 퇴계의 학설을 종지로 삼고 기호학파의 학설을 절충하려 했던 스승들의 견해를 지지하고 따랐다. 퇴계학파의 일원임을 분명히 하면서, 스승의 학설을 묵수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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