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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3호
발행연도
2021.8
수록면
5 - 34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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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가 절대 부족한 가야사 연구에서 국내 사료인 『삼국유사』에 수록된 「가락국기」의 내용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 가운데 6가야의 시조 誕降卵生說話 는 「가락국기」에만 적힌 유일한 기록이었다. 여기서 비롯한 6가야설은 가야 단일연맹설의 근거가 되었다. 문제는 「가락국기」에 적힌 가야의 범위에는 6가야를 훨씬 넘는 諸國들이 산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즉 加羅라는 국명을 지닌 정치체는 김해와 고령 2곳에 불과하였다. 그러면 6가야 시조설화는 언제 성립한 것이었을까? 일반적으로는 전승에 근거하여 신라 말, 고려 초에 정리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곳 호족들이 반신라적인명분으로 가야를 들먹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6가야 지역의 호족들간에는 연대나 유대의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안라가야가 소재한 함안 지역의 호족은 신라에 대한 절의를 내세우면서 왕건에 대적하였다. 그리고 가야로인식한 세력은 신라 말에도 2곳에 불과하였고, 시조 탄강설화도 6卵이 아니라 獨 卵이 원형이었다. 고려 전기에 편찬된 「구삼국사」에 적힌 列國 가운데 沃沮와는달리 가야는 수록되지도 않았다. 가야는 옥저보다도 존재감이 없었음을 뜻한다. 「가락국기」에 수록된 6가야는 고려 문종대인 11세기 후반에 왕실의 외척으로득세하던 인주 이씨 세력과 엮어져 있었다. 수로왕을 공통의 시조로 하는 인주 이씨 세력에 의해 금관가야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한 목적에서 6가야와 더불어 넓은강역을 창출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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