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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방상근 ((재)한국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동양학 동양학 제68호
발행연도
2017.7
수록면
175 - 198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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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876년부터 1910년 사이, 프랑스 선교사들의 한국 정착과 한국에 대한 인식 문제를 살펴본 글이다. 프랑스 선교사들은 재입국한 1876년 이후 신자공동체를 재건하는 한편, 전교회장을 양성하고, 고아원, 양로원, 시약소, 무료 장례 등의 활동을 전개했으며, 학교도 운영하였다. 선교사들의 이러한 활동은 당시 천주교의 인상을 좋게 하고 외교인들을 감화시켜 신자수를 증가시켰고, 천주교가 지역 사회와 소통하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의 정착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선교사들은 조불조약의 ‘영사재판권, 외국인 보호’ 조항과 프랑스 공사의 후원을 토대로 선교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이들은 양대인으로 호칭될 정도로 향촌 사회에서 영향력이 커졌고, 이러한 선교사들의지위 향상은 교세의 증가로 이어졌다. 이와 함께 1895년 1월에 있었던 남종삼과 홍봉주의 신원 조치와 8월에있었던 뮈텔(Mutel) 주교의 고종 알현도 선교에 영향을 미쳤다. 역적으로 취급되던 신자들이 신원되고, 사교라고 탄압받던 천주교의 책임자가 국왕을 만났다는 것은 선교사들이 지역 사회에 정착할 수 있는 중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한편 개화기 한국 사회에 정착했던 선교사들은 서구문화 우월의식에 입각하여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평가했고, 한국이 정치적으로 부패하고 낙후되었다는 인식 아래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외면했다. 선교사들은 착취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고, 일제의 침략이 의미하는 바도 이해하고 있었지만,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체제옹호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가 유지될 때에는 왕조 체제를 옹호했고, 1905년 이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들였다. 결국 종교의 자유, 한국의 독립 능력에 대한 회의가, 개화기 프랑스 선교사들이 한국의 민족 문제를 외면한이유지만,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프랑스인으로서 한국 문제를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이 깔려있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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