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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오택현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41호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63 - 8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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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 왕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백제 초기 왕계가 기록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는가라는 기본적인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백제 초기 기록을 비교·검토한 결과 시기는 검토가 필요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순서는 대체로 믿을 수 있다. 또 후대의 기사가 미리 보입되어 기록된 이유는 『삼국사기』 찬자들의 의도가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고이왕과 근초고왕은 백제 초기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왕이다. 근초고왕은 백제의 전성기를 구사한 왕으로 이해되고 있다. 고이왕은 좌평 분화 및 16관등 제정, 복색 제정 등의 업적을 남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고이왕 관련 기록은 후대의 기록이 보입된 것이다. 그렇다면 고이왕 시기에 왜 후대의 기록이 보입된 것일까. 고이왕 시기 백제는 낙랑과 끊임없이 대결을 했지만, 한편으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받고자 했다. 하지만주변 지역에서 발견되는 고고학 유물을 보면 중국 및 낙랑계 위세품이 한강유역 백제에서 보이지 않기에, 낙랑이 백제를 견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에 있던 유이민과 낙랑·대방군의 유민들은 백제에 있어 매우 소중한 인적 자원이었다. 이를 이해하고있던 고이왕은 끊임없이 낙랑의 사람들을 원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낙랑에게 백제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람들을 원하고, 낙랑의 지역을 공격했다는 점은 백제가 낙랑의 인적 자원을 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고이왕의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로 미루어 보면 고이왕 시기 좌평 분화 및 16관등 제정, 복색 제정이 완성되지는 못해도,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고이왕 시기 국가의 틀을 만들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삼국사기』 찬자들은 고이왕 27년 조에 관련 기사를 보입함으로써 고이왕의 업적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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