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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주홍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46권
발행연도
2022.2
수록면
127 - 159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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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686년의 신라의 대당 외교 활동을 분석한 글이다. 삼국사기 에는 686년에 신라가 예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이듬해 태조와 직계 4친으로 구성된 祖廟에서 致祭한 기록과 연결하여, 신라가 예기 를 수용하여 제후 5묘를 정립하였다는 해석이 있다. 그러나 신라는 진덕왕대에 신정 예기 와 예기정의 를 수용하였다. 따라서 686년의 예기는 예기 가 아니라 구당서 와 신당서 의 기록대로 당례이다. 그런데 신라는 진덕왕대에 진서 를 통해 오례의 개념을 알았고, 정관례 도 수용하였다. 태종무열왕대는 양국의 관계가 긴밀하였으므로 현경례 도 수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당은 677년, 678년에 당례를 개편하였다. 686년에 신라가 요청한 당례는 바로 이것이다. 그런데 신문왕은 새로운 당례를 수용하지 않아도 국가의례를 정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기왕에 수용된 당례에 따라 683년에 국왕의 혼례를 거행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당은 군신적 세계질서를 구축하는 방법의 하나로 경전을 사여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대당 관계의 개선을 위해 당례를 요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문왕은 즉위 초부터 대당 관계를 개선하고자 외교 활동을 벌였다. 681년에 당에 사신을 파견하여 문무왕의 사망과 자신의 즉위를 알렸다. 684년에도 사신을 파견하여, 당의 요청에 따라 그해 12월에 일본의 견당학생의 귀국을 도왔다. 685년에 망덕사를 창건하여 이 소식을 686년에 파견한 하정사를 통해 알렸을 것이다. 686년의 기록은 신라의 요청이 성사된 시점이다. 당 측천은 686년에 다시 임조하였고,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기 위해 신라의 요청을 이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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