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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종태 (해미국제성지 신앙문화연구원)
저널정보
한국교회사연구소 교회사연구 敎會史硏究 第61輯
발행연도
2022.12
수록면
297 - 342 (46page)
DOI
10.35162/rfkch.2022.12.61.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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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연구가 미진한 해미 순교 터와 아직 연구가 없는, 해미순교자들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터에 대해 규명해 보았다. 그중 읍성 안의 옥은 해미의 여러 순교 터 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이다. 정사박해(1897~1899)부터 병인박해(1866~1868) 때까지 순교 터를 알 수 있는 56명 중 33명의 순교자가 옥에서 나왔다. 1799년 12월 15일 이보현과 인언민이 매 맞아 순교한 장터는 5일에 서는 남문 안 장터였다. 1817년에 체포된 손연욱이 오래 옥살이하다 1824년에 순교한 터는 옥 근처 샘이 있던 곳이다.
바로(Barraux, 范) 신부가 1935년에 병인박해 당시의 여러 목격 증인과 다수의 전문(傳聞) 증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당시 해미에서 벌어진 천주교도의 처형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해미 순교자 약사』의 내용과 박해 시기 해미에서 처형된 순교자들에 관한 자료들, 그리고 구체적인 구전 자료로 볼 때, 서문 밖에서는 병인양요로 박해가 격화된 1866년 10월 이후와 그 여파가 미친 1867년에만 한시적으로 교수(絞首) 처형과 자리개질 처형만 이루어졌다.
그동안 참수 처형 터로 추정된 서문 밖은 그 터로 입지적 조건이 적합하지 않고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 반면에 해미천 변 숲정이는 입지적 조건이 잘 갖추어져 있고, 숲정이에서 일반 죄인도 죽였다는 구체적인 증언이 있으며, 박화규가 참수 처형된 곳도 숲정이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병인박해 때 6명이 참수당해 순교한 곳은 숲정이 해미천 변 모래밭으로 판단된다.
해미와 같이 죄인을 심문하고 처형하는 권한을 갖고 있던 포도청이나 진영이 있던 서울이나 지방에는 처형된 죄인의 시체를 내다 버리고 묻어 주는 터가 있었다. 또한 숲정이는 여우가 살아 여숫골이라 불리었고,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에서 생매장하면 그러한 수고를 덜 수 있었다. 그리고 홍주의 숲거리 생매장터는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시신들을 내다 버리고 매장한 곳이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해미 숲정이도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곳으로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숲정이(여숫골)는 생매장 순교 터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참수 터로서의 의미와 여러 형장에서 처형된 천주교도의 시신뿐 아니라 일반 죄수들의 시신 등도 내다 버리고 매장해 주던 터로서의 의미를 복합적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므로 숲정이(여숫골)는 해미의 여러 순교터 중에서도 가장 큰 역사적 의미가 배어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목차

국문 초록
1. 머리말
2. 읍성 안의 여러 순교 터
3. 서문 밖 순교 터
4. 숲정이 참수 터와 시신 유기·매장지
5. 맺음말
참고 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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