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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강봉룡 (목포대)
저널정보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도서문화 도서문화 제59집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131 - 168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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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해양 태동기와 융성기에 접경성의 특징으로 인해 나타나는 인천해역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갈등의 해소과정을 거쳐 문화교류의 통로로 기능하게 되는 여러 양태들을 살펴보았다.
먼저 미추홀을 백제 초기 인천 해양세력의 원류로, 대진과 능허대를 인천해역 접경성의 태동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대진은 지금의 문학산과 청량산 사이의 만입한 곳으로, 능허대는 문학산 서단의 현 옥련공원 일대로 비정해 보았다.
다음에 관미성은 4세기 말 광개토왕이 백제 진출을 위한 해양 교두보 확보 차원에서 공취한 곳으로 파악하였다. 관미성은 양국 사이 접견성의 갈등이 폭발한 현장으로서,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곶’의 지형으로 튀어나와 있는 오두산상에 비정하였다.
7세기에 이르러 동아시아대전으로 비화되면서 인천해역의 덕적도는 당 수군이 황해를 횡단하는 핵심 경유처로 부상하면서 동아시아적 접경성의 긴박감을 대변하게 된다. 660년 소정방이, 662년(혹은 663년) 손인사가 당 수군을 거느리고 황해를 횡단하여 덕적도에 경유, 주둔하였으니, 덕적도는 나당연합군 결성의 매개처이자 백제를 공파하는 교두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7세기 후반에 이르러 동아시아대전은 나당전쟁으로 전환되었다. 이 때 천성은 상륙하려는 당 수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신라의 해안수비대 사이에 혈전이 벌어지면서 동아시아적 접경성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는 현장이 되었다.
나당전쟁이 신라의 승리로 귀결되어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일정한 숙려 기간이 지난 8세기부터는 당-신라-일본 사이에 평화적 문물교류가 활성화되었다. 인천해역은 이전 접경성의 갈등과 대립의 흑역사에서 벗어나 동아시아 해양교류의 중핵으로 떠올랐다.
가탐의 바닷길(‘高麗道’)에 의하면, 덕적도는 황해 횡단해로와 서해 연안해로가 교차하는 바닷길의 핵심 길목으로 자리잡았고, 강화도와 교동도 역시 산동반도에서 唐恩浦에 이르는 연안해로의 거점 섬으로서 상당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서긍의 바닷길로써 보면 인천해역의 활기를 느낄 수 있다. 특히 영종도(당시 자연도)에는 慶源亭이라는 객관이 설치되어 있어 이곳에서 사신 일행이 머무르며 강화도와 김포 사이의 ‘급수문’ 구간을 통과하기 위한 준비를 했던 것으로 보았다. 경사의 근원이라는 의미의 ‘경원’은 이자겸으로 대표되는 고려시대 인주(경원) 이씨 가문이 해양세력으로 급성장한 사정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고구려와 백제 사이 접경성의 갈등과 대립
Ⅲ. 7세기 접경성의 갈등과 대립의 동아시아적 확대
Ⅳ. 통일신라~고려시대 동아시아적 접경성 갈등의 해소와 바닷길
Ⅴ. 맺음말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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