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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권은주 (동북아역사재단)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4호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51 - 89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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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이후 신라의 대외 관계 대상은 당과 일본이었다. 678년 당은 북방세력의 흥기로 인해 한반도 재정벌을 포기하였고,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국내외 정치 변화 속에서 신라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해 졌다. 신라 역시 신문왕대로 들어서며 전쟁의 여파를 수습하고 체제 안정을 위해서 대외 안정이 필요하였다. 681년 당에서 새로 즉위한 신문왕에게 선왕의 관작을 잇게 하면서 기본적인 조공책봉 의례 관계를 회복하였다.
나당전쟁 이후 신라의 대일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지만, 698년 일본이 신라 사신을 처음으로 하정례에 참석시킨 이후 신라를 번국시하면서 상황이 변했다. 신라는 일본의 의도를 거부하였고, 다자 외교의 필요성에 의해 699년 대당 외교를 재개하고 대조영에게 대아찬을 주었다. 그러나 발해가 급성장하며 713년 당으로부터 발해군왕으로 책봉을 받고 신라와 비견되는 국위를 인정받자, 신라는 발해를 경계하게 되었다. 신라는 국방 경계를 강화하는 한편 견당사를 빈번하게 파견하며 발해와 북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의 도움이 절실하였던 당과의 관계를 주도적으로 강화해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발해와 일본은 상호 연대를 통해 신라와 당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720년대 발해는 당과 흑수말갈 문제, 대문예의 당 망명 등으로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730년대에 들어 당과의 완충지대인 요서지역이 불안해 지자 거란을 돕기 위해 732년 당의 등주를 공격하였고, 이듬해 거란, 돌궐 등과 함께 마도산 전투에서 당을 크게 위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라는 당과 제2의 나당연합을 형성하였고, 연합군은 733년 겨울 무렵 발해의 남경을 공격하였다. 신라가 참전한 원인은 당과 발해의 대립관계를 이용하여 패강 지역 진출과 영유권 공인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
8세기 전반 국제관계의 변동 속에서 신라가 일본과 발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당관계에서 펼친 전략은 ‘군자국’ 전략이다. 당이 신라를 ‘군자국’이라고 한 것은 중국 고전에 보이는 순종적이고 어진 ‘군자국’의 이미지를 신라에 덧씌워 중국에 위협을 가하지 않고 섬기며 禮를 알고 중국의 변고에 조력자인 신라를 기대하였기 때문이다. 당의 이러한 기대를 활용하여 신라 역시 다른 夷狄과 차별화 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신라의 ‘王城國’ 표현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세기 전반 신라의 ‘군자국’ 전략으로 형성된 이미지는 9세기말까지 유효하였고, 신라는 자타가 인정하는 문명국가 ‘군자국’이 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7세기 말 북방민족의 興起와 신라의 대외 환경 변화
Ⅱ. 7세기 말~8세기 초 신라의 대외 관계
Ⅲ. 720~730년대 동북아 국제전쟁과 제2의 나당연합 형성
Ⅳ. 신라의 대외 전략, 夷狄에서 君子國으로의 전환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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