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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보렴 (이화여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5호
발행연도
2022.3
수록면
243 - 276 (34page)
DOI
10.37331/JKAH.2022.3.105.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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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가 발달한 국가에서는 행정업무를 원활히 운영하기 위하여 감찰제도가 성립된다. 이는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라의 감찰기구는 司正府, 外司正, 內司正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정부는 중앙행정기구를, 외사정은 지방관을, 내사정전은 내성 내의 관부를 감찰한다.
그동안 司正 기구에 대한 연구는 신라의 중앙행정기구에 대한 연구에서 주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정 기구를 종합한 단독 논고는 없다. 본 글은 사정 기구가 성립된 배경과 역할에 대해 서술하였으며, 이를 통해 사정 기구의 운영상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사정 기구는 6~7세기에 점진적으로 증설되었다. 사정부는 진흥왕 5년(544)에 처음 관원이 설치되었으며 무열왕 6년(659)에 이르러서 5등 관제를 갖추게 된다. 외사정은 문무왕 13년(673)에 주 2인, 군 1인이 설치되었으며 경덕왕대에 이르러서는 133인으로까지 확대된다. 내사정전은 경덕왕 5년(746)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관료제의 발달과 함께 설치되었다. 이와 더불어 사정부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적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에 관리들의 불법행위와 이탈을 막기 위해 목적도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외사정은 전쟁으로 인해 확장된 영역의 지방관을 감찰하기 위해 설치되었으며, 내사정전은 내성 내 관부의 증치과정에서 설치되었다.
신라의 사정 기구는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고 보았다. 외사정의 경우 경덕왕대 133인이라는 규모로 보아 주군의 치소에 상주하는 형태로 설치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사정부가 지방을 감찰하고자 하였다면 1~2인을 파견하여 광범한 지역을 순행한 뒤 왕경으로 귀환하게 하는 편이 효율적이다. 내사정전은 내성 정비과정에서 당 宮官의 감찰 관원을 본따 설치한 것으로 보이며, 이들은 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내성 내 궁인에 대한 감찰도 겸했으리라 보았다.
신라의 중앙집권체제가 안정적일 때는 사정 기구도 안정적으로 운영되었다. 그러나 9세기에 신라의 중앙 권력이 흔들리는 상황에서는, 특히 외사정의 기능도 흔들렸던 것으로 보인다. 김헌창의 난 당시 외사정의 존재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과 도독의 독단적인 군사권 행사에 그 어떤 제약도 없었던 것을 보면, 이 시기 외사정의 운영이 순탄치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사정부와 외사정이 태봉과 고려에 어떻게 계승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다만 내사 정전은 고려의 내봉성으로 통합되어 기본적인 감찰업무를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았다.

목차

국문 초록
I. 머리말
II. 司正府의 설치와 그 배경
III. 司正 기구의 확대
IV. 신라 司正 기구의 특징
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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