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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희준 (고려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47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59 - 8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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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신라의 ‘党項城’에 대해서 기존 연구들이 가지고 있던 개략적인 이해를 비판하면서, 그 구체적인 연혁을 사료에 입각하여 새롭게 밝혀보고자 한 결과물이다. 党項城은 신라의 對唐 교류에 있어 교두보이자 관문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 城이다. 본래 신라는 당항성을 “唐으로 가는 길목의 城”이라는 의미로 ‘唐項城’이라 한자 표기하고, 治所로 삼아 남양 지역 일대를 唐城郡으로 편제하였다. 여기서 唐城郡의 ‘唐城’은 ‘唐項城’에서 ‘項’자를 생략한 뒤 郡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신라는 善德王 2년(633)에 ‘唐項城’의 한자 표기를 ‘党項城’으로 수정하였다. ‘党項’이란 隋·唐代 중국의 서쪽 변경에서 활동하던 이민족, 탕구트(党項, Tangut)를 가리키는 특수한 단어였는데, 신라가 이를 對唐 교류의 관문성 명칭으로 차용했던 것이다. 여기에는 전 해(632)에 있었던 당 태종의 탕구트 복속과 서쪽으로의 당 영토 확장을 축하하는 의미뿐만 아니라, 당 태종이 탕구트에 대해 펼친 위무책으로 인해 서방 진출의 중요한 발판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실을 환기시키고, 이에 견주어 선덕왕에 대한 책봉을 긍정적으로 재검토하게끔 만들 명분을 제시하고자 한 계산까지도 담겨 있었다. 이는 새롭게 왕위에 오른 善德王이 여왕의 왕위 계승 문제를 두고 불거진 정통성과 정당성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꺼내든 여러 외교적 카드 중 하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후 党項城은 7세기 삼국통일전쟁 과정에서도 지속적으로 對唐 통교의 관문으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다가 삼국통일전쟁이 종결되자 신라는 神文王代 전국적으로 지방행정구역의 정비를 단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당항성에 위치해 있던 唐城郡의 治所가 평지로 이전되게 되었다. 이에 党項城이 지니고 있던 郡治로서의 지위와 對唐 관문으로서의 역할은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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