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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한문학회 대동한문학(大東漢文學) 대동한문학(大東漢文學) 제56권 제56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33 - 165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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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隱峰 李鳳徵(1640~1705)이 2년(은봉 1673~1674, 34~35세)에 걸쳐 두 차례 영남지역을 여행하던 도중에 경험한 樓亭에 대한 감회와 그 旅程에 따른 소회에 대한 시적 형상화를 살폈다. 이는 조선후기 근기남인 중 淸南系列인 은봉의 삶과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뿐만 아니라, 당대 근기남인학파의 산수 유람관 및 선진복고운동을 엿볼 수 있는 단서로 활용하려는 의도이다. 은봉은 9세에 그의 부친 이한을 여읜 뒤에 넷째 숙부인 襘에게 의탁하고 임지를 따라 전전하였다. 그의 첫 受學은 12세가 되어 둘째 숙부인 袗으로부터 시작 되었고, 16세 때는 종고모부 洪宇遠으로부터 綱目을, 종형 觀徵으로부터는 통감을 배웠다. 특히, 이관징에게는 그가 과거에 급제할 때까지 가르침을 받는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그의 산수 유람에 따른 大觀도 이관징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이루어졌다. 또 은봉은 眉叟 許穆을 私淑하면서 그의 학문형성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가 ‘文은 貫道之器이다’라고 선언한 고문운동도 미수의 선진복고운동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은봉의 학문은 權瑍(1736~1716)으로부터는 ‘古文家’로, 柳尙運(1636 ~1707)으로부터는 ‘문은 간이하면서도 법도가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또한 은봉은 미수 사후, 그의 주관 하에 미수의 『記言』을 간행함으로 근기남인학파 형성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탁월한 학자인 李玄逸(1627~1704), 權瑎(1639~1698), 李衡祥(1653~1733), 李淯(1644 ~1730) 등과 교유에서 은봉의 학문적 소양을 크게 인정받게 된다. 은봉의 학문은 고문에 치우친 학문적 경향 때문에 26세 때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제하게 된다. 이후 무료한 세월을 보내던 중 종형 이관징이 영남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2년(1673~1674)에 걸쳐 두 차례 영남을 여행을 하던 도중에 지은 기행시가 주목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樓亭題詠詩’와 그 ‘旅程의 묘사’로 대별하여 고구하려고 한다. 먼저 ‘樓亭題詠詩’에는 <淸心樓>, <自天臺>, <暎湖樓>, <讚慶樓>, <觀魚臺>, <淸德樓>, <臨瀛閣>, <朝陽閣>, <歸來亭>, <受月亭> 등에 대하여 읊은 시가 있고, 다음으로 ‘旅程의 묘사’는 <過峽出海>, <次道南作>, <觀魚臺途中>, <過眞寶角山>, <淸河客舘詠梅>, <宿安康>, <過玉山> 등을 노래한 작품이 보인다. 특히 <暎湖樓>와 <朝陽閣>에 대한 시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쉽게 접할 수 없는 누정이다. 은봉은 이번 여행을 통해 실제적 경험과 견문을 쌓아 자신의 실천적 기상을 함양하게 된다. 아울러 영남의 정통 성리학을 접함으로 고문과 박학에 치중된 근기학문의 경향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된다. 이로 인하여 그는 숙종 원년(1675)에 실시된 증광별시문과 장원급제하고 바로 출사하는 좋은 성과를 이룬다. 또한 이러한 그의 학문적 성과는 고문운동의 일환으로 사변적인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하는 근기남인학파의 학문형성에 지대한 공헌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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