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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광연 (동국대학교 불교문화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사상사학회 한국사상사학 한국사상사학 제53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231 - 259 (2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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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교양종(五敎兩宗)은 한국의 불교 종파(宗派) 논의의 핵심이 되는 용어이다. 일찍이 김영수(金映遂)는 신라 때부터 오교(五敎)라는 종파가 있었고, 신라 말에 오교구산(五敎九山), 고려 숙종 때 오교양종으로 종파가 변모해갔다고 하였다. 이후 오교구산의 허구성이 비판되었고, 오교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새로운 논의들이 시도되었다. 그럼에도 오교양종이 12세기 이후 고려시대 불교 종파를 총칭하는 말이라는 의견에는 별다른 의심이 없었다. 하지만 오교양종(양종오교・오교이종)은 13세기 이전의 사료에는 나오지 않는 표현이고, 시기 별로 그 성격이 변화해갔다. 무신집권기에 왕사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오교와 양종이 결합된 양종오교가 처음 등장한다. 최충헌과 최우가 기득권이 없는 개별 불교 집단들도 포섭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지방에 거점을 둔 불교 집단들까지 중앙 정부 및 중앙 불교계와 소통할 수 있는 통로가 생기게 되었다. 무신집권기의 양종오교는 최씨 정권에 우호적인 불교 집단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원간섭기에는 오교양종의 역할이 점차 확대되었다. 오교양종은 공의(共議)에 간여하였고, 국왕 주도의 불사(佛事)나 국가 행사에도 참여하였다. 여러 사례들을 볼 때, 원간섭기의 오교양종은 단순히 모든 불교 집단의 총칭이라기보다는 개별 불교 집단, 그 가운데서도 친통치자적인 성향을 지닌 불교 집단을 대표하는 승려들로 구성된 본부(headquarter)나 일종의 중앙 기구로서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성계 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공양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오교양종을 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후의 오교양종은 한편으로는 기구로서의 외형을 유지하면서도 원간섭기 때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위상이 약화된 오교양종은 1424년(세종 6) 해산되게 되는데, 이때의 오교양종은 도읍에 거점을 두고 있는 주요 불교 집단들을 지칭하는 명칭으로도 이해된다. 이와 같이 오교양종은 고려후기~조선전기 역사적 상황에 따라 그 성격이 변화해갔다. 선행 연구에서처럼, 오교양종이 불교 종파의 총칭이라는 해석이 적용되는 시기가 있기도 하였지만, 고려 12세기 이후 전 시기에 걸쳐 단일한 성격을 유지하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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