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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여호규 (한국외국어대학교)
저널정보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역사문화연구 역사문화연구 제74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3 - 54 (5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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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구려와 한의 접경공간 변천에 따른 주민집단의 잡거양상을 고찰한 것이다. 고구려와 한의 접경공간은 네 차례 변모하였고, 주민집단의 잡거양상도 달라졌다. 기원전 107년 제1현도군 설치 이후, 압록강 중상류 일대에는 土着住民과 漢人이 雜居하기 시작했지만, 漢人이 郡縣城 내부에 거주했기 때문에 ‘混在’ 양상을 띠지는 않았다. 漢의 선진문화가 토착사회에 보급되는 가운데, 교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通化 赤柏松古城 1호 주거지의 온돌시설에서 보듯이 漢人들이 토착문화를 수용하기도 했다. 기원전 75년경 제1현도군이 蘇子河 방면으로 쫓겨났다. 이에 따라 고구려 지역과 제2玄菟郡의 중심부가 공간적으로 분리되었지만, 前漢 말까지는 제2현도군의 屬縣이 압록강 중상류에 잔존했기 때문에 명확한 境界가 성립되지 않았다. 다만, 양자의 중심부를 잇는 桓仁 西北路에서는 太子河 상류의 梁貊이 완충지대를 이루었고, 桓仁 東北路에서는 富爾江-蘇子河 상류의 분수령 지대가 접경지대로 인식되었다. 명확한 경계는 성립되지 않았지만, 양자의 중심부를 가르는 접경공간이 점차 형성되었던 것이다. 서기 1세기 중반경 고구려가 후한의 유화책을 틈타 제2현도군의 분리통제책을 봉쇄했다. 이때 고구려는 압록강 중상류에 잔존했던 제2현도군의 속현을 점령했는데, 通化 赤柏松古城의 제2기 건물군이 미완성 상태에서 폐기된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이에 후한은 고구려 지역과 접경을 이루는 ‘東界’에 ‘幘溝婁’라는 성곽을 쌓아 朝服과 衣幘 등 고구려에 사여하는 위세품을 두었다. 이에 따라 蘇子河-富爾江의 분수령 지대로 비정되는 ‘東界’가 점차 고구려와 제2현도군의 경계로 인식되었다. 서기 1세기 말경 고구려가 후한의 정세 악화를 틈타 제2현도군을 점령하고 후한과의 국경선을 遼東故塞까지 크게 물리쳤다. 永陵鎭古城 北城의 제4기 전기 문화층은 제2현도군 퇴축 이후로 편년되는데, 後漢의 전통을 계승한 대형건물지와 고구려의 온돌시설을 갖춘 소형 주거지가 동시에 확인되었다. 제2현도군 퇴축 이후 永陵鎭古城에 高句麗人과 漢人이 雜居하였던 것이다. 제2현도군의 퇴축으로 양국의 국경이 명확하게 형성되었지만, 주민집단의 잡거는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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