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장태한 (Univ. of California at Riverside)
저널정보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사회과학연구 사회과학연구 제29권 제1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28 - 167 (4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논문은 상해 임시정부가 선포한 '민주공화제’의 새로운 ‘미국발’ 계보를 제시하고 있다. 박찬승은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했다. “1910년까지 국내에서 공화제를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9년 만에 이러한 상황이 초래되었을까?” 더구나 1919년 민주공화제를 도입하면서 “민주공화제”에 대한 토론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는 것 또한 의문이다. 박찬승은 그 이유가 공화제 임시정부는 이미 대세였기 때문이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917년에 상하이에서 14명의 명의로 해외 각지에 있는 크고 작은 단체의 대표자 회의인 민족대동대회를 열어 독립운동의 최고 기관으로 임시정부를 설립하자는 주장을 한 <대동단결선언>에 의해 민주공화제 수용이 더욱 확고해 졌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다.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대동단결선언> 발기인 14인의 대부분이 북경과 상해에서 활동했고 특히 1911년 중국혁명을 외적 요인으로 꼽고 있으면서 ‘중국발’ 계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 논문에서는 미주한인들이 민주공화제 도입을 주도했고 특히 안창호를 중심으로 대한인국민회와 신한민보가 민주공화제를 적극 주장하고 수용했다. 또한 <대동단결선언> 발기인에 박용만이 포함되어 있으나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필자는 이 논문에서 박용만을 통해 무형정부론이 <대동단결선언>으로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런데 <대동단결선언>에 관한 세 가지 주목할 점이 있다. 첫째, <대동단결선언> 원본이 독립기념관에 기증된 안창호의 유품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안창호와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대동단결선언>과는 연계가 있다. 둘째,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에서 통과된 21조 의안과 <대동단결선언> 내용이 매우 흡사하다. 셋째, <대동단결선언>에 서명한 14인 중에 박용만이 있다는 점이다. 즉, 민주공화제의 ‘미국발’ 계보는 신한민보는 1909년부터 임시정부 건설론을 주장했고 1911년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는 이러한 주장을 수용하고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신설 즉 무형정부 설립을 공식화했으며 1912년 중앙총회가 정식으로 설립됐으며 그것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으로 연결되며 1919년 상해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 도입이 가능했다는 설명이다. 사회학적 상상력과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적 관점을 접목시켜 더 넓게 1948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민주공화제의 토대로도 인정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이 논문을 끝내고자 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52)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