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종태 (새남터 아카데이)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18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72 - 123 (5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경기도 고양 용머리 천주교 신앙공동체는 1827년 무렵에 형성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을 이어왔다. 이러한 사실은 서울 서강 밤섬에 살던 김효임·김효주 자매의 가족들이 입교한 뒤 1829년 이전에 외가가 있는 용머리로 이주하여 신앙생활을 한 점과 용머리에 살던 원윤철의 가족들이 1827년 이전에 입교한 점으로 보아 알 수 있다. 1835년 말 모방 신부가 입국했을 때 용머리 교우촌의 신자는 총 30~40명이었다. 이러한 용머리 교우촌은 모방 신부의 사목 방문을 통해 공소로 설립되었다. 이때 공소집 주인 김 안토니오는 공소회장으로 임명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용머리 공소의 김효임·김효주 가족들이 체포되었다. 그들 중 김효임·김효주 자매만 모진 고문에도 신앙을 굳게 지켜 순교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배교하고 풀려났다. 이때 용머리 출신으로 서울에 살던 원귀임도 체포되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했다. 체포를 면한 원윤철은 기해박해 이후에도 용머리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선교사들을 영입하는 일에 힘을 쓰는 등 교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그러나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10월 원윤철이 생질 성연순과 함께 용머리에서 체포되어 순교하면서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또 시련을 맞았다. 그 뒤 1886년 한불조약의 체결로 선교사들의 전교 활동이 가능하게 되면서 용머리 신앙공동체는 재건되어 1910년부터 행주 본당 소속 고양 지역 공소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으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양 지역의 대표적인 신앙공동체로 그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므로 용머리 공소는 고양 지역의 유서 깊은 신앙공동체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