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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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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선아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추진단)
저널정보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한국민족운동사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105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235 - 277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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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규는 1910년대 중반부터 1920년대 중반까지 대한인국민회에서 북미지방총회 학무원, 북미지방총회 부회장, 중앙총회 부회장 등 다양한 실무를 도맡았다. 그는 버클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한국경제사』를 남길 정도로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는 자연히 그의 민족운동의 방향과 진로에 영향을 끼쳤고, 한인사회에 직접 뛰어들어 직접 자금을 모으고 배분하는 일에 힘썼다. 그의 학문적 배경과 대한인국민회 활동은 이후 총회장으로서 미주 한인사회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926년부터 1934년까지 국민회 총회장을 맡은 백일규는 세계경제대공황과 민족운동에 관심이 적은 한인 2세의 증가 속에서도 국민회의 발전과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일제의 만주침략을 계기로 미주 한인사회의 단결과 임시정부로 독립운동 역량 집중을 위해 미주한인연합회를 조직했다. 그는 지속적으로 미주 한인사회의 통일 문제를 공론화시켰다. 백일규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단체인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 학생들에게 『신한민보』에 재미한인사회과학연구회와 관련된 많은 지면을 제공하려고 노력했다. 미주 한인의 연합을 위한 것이었다. 1940년대에는 조선민족혁명당 북미총지부의 기관지인 『독립』 발기인, 사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독립』을 통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내 국민회 세력과 흥사단의 비개혁적을 성향을 비판했다. 다만 자신을 국민회 회원 백일규라는 이름으로 보수세력을 비판했다. 오랫동안 국민회 총회장을 맡았던 백일규는 연합을 통해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국민회의 비판적 지지자를 자칭하며 진보진영에서 활동했다. 이처럼 백일규는 미주 한인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연합활동의 흐름을 이어나가며 미주 민족운동의 활성화에 기여한 인물로서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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