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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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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McBride Richard D. II (Brigham Young Univ Hawaii) 정지선 (서울시립대학교)
저널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동국사학 제69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603 - 649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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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富軾(1075-1151)이 1145년에 편찬한 유교 중심의 『三國史記』와 一然 (1206~1289)이 처음 찬술하여 후대 편집자들이 수정했고, 불교의 영향을 받은 『三 國遺事』 모두 신라 眞聖女王(재위: 887~897)을 부도덕하고 음탕한 통치자로 기억하고 있다. 이것은 기혼의 상대등 김위홍과의 불륜 그리고 당나라 여제 武則天(재위: 690~705)을 연상케 하는 타락한 행동들 때문이다. 10년이라는 짧은 그녀의 통치 기간은 기근으로 얼룩졌고, 3번의 반란으로 훼손되었다. 元宗과 哀奴의 난(889), 後百濟의 건국자 甄萱(936년 사망)의 봉기(892)와 붉은 바지를 입은 도적 赤袴賊의 반란(896)이 그것이다. 그녀의 유명한 행실과 이런 반란들은 그녀가 통치하기에 부적당하고, 신라가 천명을 잃었다는 증거가 되었다. 그렇지만, 동시대에 재능을 발휘하지 못한 학자이자 관리인 崔致遠(855~908년 이후 사망)은 중국 당나라와의 공식 문서에서 그녀를 탐욕이 없는 자애로운 통치자로 묘사했다. 이 논문에서는 그녀와 김위홍과의 복잡한 관계와 신라의 쇠퇴를 알리는데 일조한 3개의 봉기를 둘러싼 상황을 분석하여 진성여왕을 동정적으로 묘사해보고자 한다. 진성여왕은 남자를 농락하던 여자이기보다는 그녀의 섭정처럼 활동한 10살 연상의 애인 김위홍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일련의 반란들은 그녀의 악정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은 낮고, 진골 귀족에 의한 신라 사회 지배에서 기인하는 고유의 빈약한 정권에서 나온 산물일 가능성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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