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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승범 (국립문화재연구소)
저널정보
한민족문화학회 한민족문화연구 한민족문화연구 제74권 제74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65 - 202 (3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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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목적은 1926년 나운규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 <아리랑>이 당시 상황에서 어떻게 흥행을 이루었으며, 나아가 민족의 영화로 자리매김을 했는지 그 시대적 배경과 역사적 의미를 살피는 것이다. ‘아리랑’은 한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콘텐츠 중에 하나이다. 오늘날 분단된 남?북한의 민족 동질성을 규명해 줄 뿐만 아니라,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는 국외 한인韓人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결속시키는 기능을 갖고 있다. 토속민요로 불리던 아리랑이 한민족의 상징으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1926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의 흥행이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된 1926년은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한 해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서 조선의 대중들은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에 맞추어 6.10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등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한편, 영화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1920년대는 무성영화의 시대였다. 영상에서 대사가 나오지 않는다. 변사에 의해서 즉석에서 영화의 대사와 내용이 전달된다. 그러므로 영화<아리랑>은 단 하나의 버전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변사와 관객에 따라서 수없이 많은 이본異本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영화<아리랑>이 어떻게 민족의 영화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을까? 이는 6.10만세운동 사건과 그 이후 재판이 전개되는 상황이 <아리랑>의 제작, 상영시기와 시간적 궤를 같이 했기 때문이다. 만세 운동으로 고초를 겪는 학생들의 재판이 그 이듬해까지 기사화되고 보도되는 동안 영화도 함께 흥행한 것이다. 당시 조선 대중의 머릿속에는 영화보다 현실이 더 영화 같았을 것이고, 훨씬 더 가혹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는 당시 조선 대중에 의해 재해석 되었다. 또한, 허리우드 스타일의 영화 구성과 서양 음계에 눈과 귀가 익숙해져 있었던 조선 관객들을 쉽게 매료시켰다. 나운규라는 천재 영화가가 흥행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여 영화를 제작하였다면, 이 영화를 민족주의적 색채로 덧칠한 것은 당시 식민지 조선의 대중들이었다. 이들은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나마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자유를 되찾기를 염원했다. 6.10만세 운동의 실패를 경험한 당시 대중들에게 영화 <아리랑>은 그 울분의 감정을 소비 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결국 3.1운동의 실패, 6.10만세운동의 좌절을 겪으면서 1920년대를 살아갔던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암울했던 자화상이 영화 <아리랑>을 통해서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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