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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형수 (한국국학진흥원)
저널정보
한국국학진흥원 국학연구 국학연구 제44집
발행연도
2021.3
수록면
9 - 44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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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지역은 임란 이전 성주의 한강 정구의 문하로 활동하였던 서사원‧손처눌 등은 임진왜란 당시 향병을 조직하여 활동한 것을 계기로 임진왜란 이후 대구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이들은 임란으로 황폐화된 대구지역을 재건하기 위하여 다방면의 노력을 기울였다. 대구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의 보급기지로 장기간 일본군이 주둔하였던 지역으로 일본군의 침탈과 주민의 유산流散으로 인하여 상당한 어려움에 처하였다.
전쟁이 종식되자 의병으로 활동한 사림들은 먼저 흥학興學운동을 통하여 향교와 연경서원을 재건하고, 인근의 정구를 초치招致하여 학문을 장려하는데 노력을 기울였다. 정구는 1605년 서사원의 초청으로 공식적으로 대구를 방문하고 강학講學을 하여 한강학맥을 대구에 정착시키게 되었다. 당시 정구는 성주에서 강학講學을 주도하였으나, 박이립 사건으로 인하여 성주를 떠나게 되자 칠곡 노곡으로 이주하면서 대구사림들과 긴밀한 연대를 맺고, 한강학파의 제 2의 근거지로 삼게되었다. 대구의 사림들은 정구의 학문적 입장을 받아들이면서 정구의 향촌 개편책을 적극적으로 인용하여 임란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하고자 하였다.
또한 대구지역은 임란 직후부터 향약을 시행하고, 향안을 개수하여 임란이전의 질서를 적극적으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정구는 임란직후 성주에서 월삭강회月朔講會를 복구하여 강학을 이어가나면서 성주 전사림이 참여하는 향약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대구지역의 향약도 이러한 정구의 입장을 계승하는 것이었고, 그 중심인물은 서사원과 손처눌이었다.
그러나 광해군대 정구와 정인홍의 사이에 갈등이 점증하면서 한강학파와 내암학파는 성주에서 박이립사건으로 인하여 폭발하게 되었다. 이 때 대구 사림들은 정구를 대구로 초치하면서 흥학興學을 도모하는 동시에 사족이 중심이 되는 향안의 개수를 추진하였고, 이는 대구지역에서 향약의 실시와 같은 궤도에서 추진된 것이었다.

목차

요약
1. 머리말
2. 임진왜란과 대구의병의 활동
3. 임란이후 대구의 흥학운동興學運動과 한강학파의 활착活着
4. 대구사림의 결속시도와 향약의 실시, 향안의 재작성
5. 「부정척사문」과 대구지역 당론의 확정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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