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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영모 (충남대학교)
저널정보
충남대학교 충청문화연구소 충청문화연구 충청문화연구 제25집
발행연도
2021.2
수록면
57 - 103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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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김화식 가계와 생애의 고찰을 통하여 학문의 연원, 항일운동과 연계하여 재지에서의 활동을 문집 등의 자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경기도 파주 거주 김화식 가계의 보령현 입향과 청소 이거는 처변(妻邊)으로 이루어졌다. 김화식의 4대 종조 김낙원이 청라동의 재지사족인 한양조씨와 결혼하여 보령현에 입향한 이래, 김화식의 조부 김재인이 한양조씨와 아들 김진국이 능성구씨와 결혼함으로써 재입향이 이루어졌다. 김화식의 숙부 김한기와 조카 김창식은 수안이씨와 각각 결혼함으로써 청라동에서 청소로 이거하였다.
김화식은 6세에 부친을 여의고 조부 김진국 밑에서 가학으로 공부하다가 족숙 김한순 찾아 배웠고 화서학파의 유중교와 유인석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런 학연으로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유인석이 주도하는 제천 의병진에 참여하여 그의 참모로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이처럼 그가 화서학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족숙 김한순이 유중교의 문인이었고, 김한순의 부친 김우현이 화서 이항로의 문인이었기에 가능하였다. 이로써 김화식이 어떻게 화서학파의 유중교와 유인석의 문하에서 공부할 수 있었고 유인석의 의병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는지 학문의 연원이 밝혀졌다.
김화식의 항일운동은 ‘척화양이’라는 화서학파의 사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가 유인석과의 3차례나 중국을 다녀오고 유인석 의병진의 진중의 일기를 정리한 『소의신편』을 발문과 함께 발간한 사실은 항일운동에서의 그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1906년부터 그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어 이 시기를 파악할 수 없었다.
김화식은 남포현, 보령현 항일운동의 모체이자 연결고리로 재지사족들과 교유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자정을 길을 선택하여 뒤 늦게 남포현으로 이주하여 집성당을 창건하여 화서학맥을 이어가던 윤석봉과 연락하며 남포현의 유림들을 항일독립운동에 끌어들이는데 앞장섰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들의 교유는 두 사람이 모두 유중교의 문하에서 공부한 화서학맥에서 비롯되었다. 김화식이 교유한 보령현의 인물들 또한 모두가 재지사족으로 유호근, 심의덕, 조구원 등 남당학파였다. 화서학맥의 김화식이 이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보령현 재지사족이 통혼권으로 형성된 하나의 공동체였고 항일독립이란 시대적 상황이 학맥의 차이를 극복한 것이었다.
김화식의 애족장 추서 시에 후손의 입증이 안 되었던 것은 실명(김화식)과 등본의 기록(김우동)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었다. 이같은 기록의 차이는 김화식의 항일독립운동에 그 원인이 있었다. 1914년 일본에 의해 호적법이 시행되면서 김화식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선전관을 지낸 부친 김진국은 관직명인 ‘김선전’으로, 본인은 ‘김우동’으로 세 아들 또한 가명이나 족보의 ‘자(字)로 등록했으나 나머지 인적사항(생졸년도, 거주지, 배위) 등은 모두 일치하였다. ‘김우동(金友東)’은 ‘청소면 진죽리 677번지’에 거주한 항일독립운동가 ‘김화식의 이명(異名)이었다.

목차

한글요약문
1. 머리말
2. 가계
3. 보령현 입향과 청소(靑所) 이거
4. 생애
5. 항일운동
6. 김화식의 이명(異名) 김우동(金友東)
7. 맺는 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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