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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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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국민대학교 한국학연구소 한국학논총 한국학논총 제53권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95 - 137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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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논문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 질서가 확립되던 16세기 중·후반 禮安 지역에서 활동했던 梅軒 琴輔의 생애와 향촌사회 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이 시기는 재지사족 층에 의해 자신들 주도의 향촌지배질서가 확립되던 시기였다. 退溪 李滉의 문인이었던 금보는 스승의 학술 활동 및 향촌사회 활동을 적극 보조하는 위치에 있었기에 금보의 행적은 16세기 중·후반 향촌사회의 일단을 이해하는데 좋은 사례가 된다. 우선 금보의 奉化琴氏 가문은 여말선초 사족 가문으로 성장하였으며, 15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많은 관인을 배출함으로써, 지역의 명문 閥族과 婚班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봉화금씨 가문의 세거지는 관향을 비롯해 예안·安東·榮川 등지로 확대되었다. 이에 금보도 혼반이었던 眞城李氏 가문의 사위가 되어 예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금보는 이황의 문인으로서 스승의 출처관을 계승하여 관직에 뜻을 두지 않은 채, 향촌에서 처사적 삶을 지향하면서 학문 연구와 향촌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금보의 향촌사회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퇴계학맥에 대한 계승 의식과 이를 매개로 한 교유 관계이다. 금보는 스승에 대한 존모 의식을 바탕으로 「陶山記考證」과 「靜存齋箴考證」을 저술하였으며, 이황 사후에는 각종 추숭 사업을 주도하였다. 또한 유람과 교유를 통해 학문적 동질감뿐만 아니라, 향촌사회 문제에 대한 공감대도 함께 형성해 나갔다. 두 번째로는 예안 지역에서 교육·교화 시설을 확충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금보는 1572년 禮安鄕校 중수에 간여하였으며, 1567년에는 易東書院 건립을 주도하였다. 또한 이황 사후에는 陶山書院 공사를 맡았는데, 이들 시설은 예안 지역에서 재시사족 세력을 부식하는데 구심점이 되었다. 세 번째는 향촌자치기구인 留鄕所 및 溫溪洞約 활동이다. 이에 앞서 이황은 재지사족 중심의 향촌지배질서 확립을 위해, 예안 유향소의 운영 규정인 ‘鄕立約條’를 제정하였다. 또한 동리 내 질서 유지와 재지사족 간 결속력 강화를 위해 운영된 온계동약에 간여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금보 역시 예안 유향소의 향원과 온계동약의 유사로 있으면서 재지사족 중심의 지위 유지와 질서 확립을 위해 힘쓰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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