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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석당논총 석당논총 제75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85 - 124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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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가 증가함에 따라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대외교류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음이 부장품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최근 발굴 조사된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는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가 금관가야 최상층 지배자 무덤인 대형 목곽묘에서 출토하여 학계를 놀라게 하였다. 과거 로만글라스는 5세기에 축조된 신라왕들의 무덤인 대형 적석목곽묘에서 주로 출토되고 있으며, 가장 이른 로만글라스는 4세기 말로 편년되는 경주 월성로 가-13호분 출토품으로 알려져 있다. 반면 김해에서 로만글라스가 출토한 대성동 91호분과 70호분은 토기편년에 의하면 약 A.D. 300년 전후로 편년되기 때문에 신라의 로만글라스보다 대략 1세기 정도의 시간차를 보인다. 로만글라스와 더불어 중국에서 최상층 계급이 사용한 진식대금구는 대성동 88호분과 70호분에서 출토되었다. 진식대금구는 中國 江蘇省 宜興 周處墓 출토품을 가장 이른 형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주처묘의 피장자인 주처장군의 몰년이 A.D. 297년으로 알려져 있어 대성동고분군 출토 진식대금구의 연대를 추정하는데 있어 참고할 수 있다. 형식 비교 결과 대성동고분군 출토 진식대금구는 宜興 周處墓, 洛陽 西郊 24號 등 중원계 진식대금구와 형식학적으로 유사도가 높고, 종래 북연의 喇麻洞 출토품은 유사도가 적기 때문에 유입 시기를 토기 편년과 일치하는 A.D. 300년 전후로 설정할 수 있다. 종래 로만글라스의 무역로는 실크로드 중 오아시스길이나 초원의 스텝로드를 이용했을 것으로 추정되어 왔다. 진식대금구 역시 중국의 남방지역에서 성행하여 북방과 고구려를 거쳐 한반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남방 특산물을 戰國時代부터 널리 애용하게 되면서 해상 무역로가 일찍부터 열리게 되었으며, 漢代에 와서 남방 교역로에 관한 자세한 내용이 『漢書』에 기록된다. 또 『後漢書』 「西域傳 大秦國(로마)條」에서 로마인의 무역 활동이 잘 그려져 있어, 지금의 동남아시아·인도지역과 적극적으로 교역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불어 대성동 91호분에서는 로만글라스 외에 日本 琉球産 고호우라 조개로 장식한 마구가 출토되고 있어 남방 무역 범위가 상당히 넓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금관가야에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가 유입되는 A.D. 300년 전후는 말레이반도에서 베트남 남부에 이르는 넓은 교역로를 장악한 扶南國이 득세한 시기이다. 부남국의 외항인 베트남 옥애오 유적에서는 2세기경의 로마 금화와 漢鏡이 출토되었다. 부남국은 중국·인도와 중계무역을 통해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로만글라스를 중국에 이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량의 철을 이용해 가야 최상층 지배자는 로만글라스와 진식대금구와 같은 위세품을 중국과의 해상교역을 통해 입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신라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서 로만글라스가 유입되었을 것이다. 가야와 중국 간의 무역항로는 계절에 따라 바뀌는 서해의 해류를 이용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갔다고 볼 수 있다. 2018년 마산 현동유적에서는 舟形土器가 출토되었는데 원거리 항해가 가능한 대형 범선을 형상화하고 있다는 점도 하나의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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