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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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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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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호남학 호남문화연구 제6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149 - 185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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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읍성이 허물어지고 도시 규모가 커지면서 기존 길이 정비되고 다양한 도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1930년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광주의 중심 가로망에 일본식 명칭을 붙이는데, 本町과 明治町이 그것이다. 본정은 광주에서 가장 번화하고 높은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었다. 조선이 본받아 달성해야 할 일본식 근대화의 상징이나 결과물 같은 존재였다. 명치정은 일본의 개화를 이끈 무쓰히토[睦仁]의 연호를 활용한 것이다. 일본이 새롭게 개설한 이 길의 시작점에는 총독의 전남지역 통치를 대행하는 전남도청이 있었고 그 주변으로 식민지 지배를 대행하는 국가기관이 즐비했다. 이 외에도 일제강점기 광주에는 텐노의 연호를 사용한 昭和町・大正町, 떠오르는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 같은 旭町과 大和町도 있었다. 광복 이후 한반도는 일본색을 지우기 바빴다. 1947년 광주에서도 본정과 명치정 이름을 없애고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일본으로부터 당한 치욕을 통쾌하게 갚아준다는 의미로 김덕령 장군과 정충신 장군이 소환됐다. 충장로와 금남로는 그렇게 생겨났다. 그러나 인물과 장소의 직접적 연관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였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광주에 다시 가로명 명명 작업이 필요하게 된 것은 광주 시가지가 급속히 확장된 1960년대 이후였다. 1978년 금남로와 충장로를 포함한 총 24개의 가로명을 시작으로 1992년까지 총 53개의 가로명이 새로 생겼다. 이 가운데 역사인물의 이름을 활용하는 기념 공간으로서의 가로명은 총 13개이다. 70・80・90년대의 역사인물 기념 가로명의 추세를 보면 초반에는 광주의 주요 정체성이자 상징 이미지인 ‘節義’를 내세우는 武人 위주로 선정되다가, 90년대에 들어서는 文人으로 급격한 변화가 이뤄진다. 그리고 가로명을 둘러싼 정치도 처음에는 ‘국가 대 국가’의 단계에서 이제 ‘가문 간 정치’이 형태로 변하면서 가문 선양의 목적에 의한 청원이 가로명 제정에 큰 힘을 발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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