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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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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8권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83 - 11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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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巖 孫厚翼(1888~1953)은 1919년 파리장서운동을 유림의 當然之理로 인식하였다. 그런데 당연지리로 여겼던 파리장서운동이 기대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손후익은 이중업과 함께 유림단의 결속력을 강조하며, 나라 밖의 김창숙과 연대하여 재차 독립청원운동을 시도하였다. 손후익이 독립청원운동을 행동으로 밀고 나가는 데는 김창숙을 비롯한 한주학파의 지향과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그는 곽종석․이두훈․장석영과 사승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한주학파의 맥을 잇고 있는 김창숙․이기원․김황 등과 교유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또 한편으로는 증대고모부이자, 유년시설 스승으로 모셨던 이만유와의 인연으로 이중업․권상익․이원각 등 정재학맥의 인사들과도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심산 김창숙과 연결된 중국을 상대로 한 독립청원 시도가 한주학파에 국한되지 않고, 이중업 등과 함께 추진된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 뒤에도 손후익은 국내에서 김창숙을 지원하며, 제2차 유림단의거를 밀고 나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1923년에는 처남이었던 정수기를 통해 김창숙의 자금모집 활동을 지원하였으며, 이어 1925년 제2차 유림단의거가 전개되자, 그 전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의 항일투쟁의 시작은 독립청원운동이라는 외교방략이었지만, 점차 김창숙이 이끄는 독립전쟁론에 공감하고, 그 목적을 위해 적극적인 군자금 모집운동에 참여한 것이다. 그가 이끌었던 독립청원운동과 제2차 유림단의거는 1920년대 유림들의 대표적인 투쟁이었다. 그 과정에서 손후익을 비롯한 그 일가들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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